||||||||||||<:><#BF2F7B> '''[[룸 술탄국|{{{#ffffff 룸의 술탄}}}]]''' || || 14대 [[클르츠 아르슬란 4세]] || {{{+1 →}}} || 15대 '''케이휘스레브 3세''' || {{{+1 →}}} || 16대 [[메수트 2세|메수드 2세]] || 기야스 앗 딘 카이쿠스라우 [[페르시아어]], [[아랍어]] : {{{+1 غياث الدين كيخسرو }}} [[터키어]] III. Gıyâseddin Keyhüsrev 생애 1259년 ~ 1284년 재위 1266년 ~ 1284년 [목차] == 개요 == [[룸 술탄국]]의 15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4세]]의 차남으로, 부왕을 암살한 페르와네에 의해 술탄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5세 전후였던 그는 페르와네와 [[일 칸국]]의 꼭두각시였고, 1277년 페르와네가 사망한 후에는 총독 콩쿠르타이가 실권을 쥐었다. 그러던 1284년, 일 칸국의 내전에 휘말려 콩쿠르타이가 숙청될 때에 케이휘스렙 역시 연대 책임으로 처형되었다. 사후 일 칸국에 의해 사촌 [[메수트 2세]]가 술탄으로 봉해졌다. 케이휘스렙은 콘야의 알라에딘 왕실 영묘에 안장된 마지막 술탄으로, 그의 처형은 룸 셀주크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 즉위 == 클르츠 아르슬란 4세의 암살 후, [[아크셰히르]]에 있던 페르와네는 서둘러 [[콘야]]로 향하여 3-7세에 불과했던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들 케이휘스렙을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그후 룸 셀주크는 사실상 페르와네와 [[일 칸국]]의 통치 하에 놓였고, 기타 셀주크 귀족들도 완전히 제압되어 1271년 재상 파크레틴 알리 (사힙 아타)가 망명 중인 [[케이카우스 2세]]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투옥된 것을 제외하면 평화가 유지되었다. == 페르와네 사후 혼란 == 그러던 1277년,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가 반몽골 튀르크 제후들의 초청으로 엘비스탄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콘야와 [[카이세리]]를 장악하였다. 당시 중립을 지키며 바이바르스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원정 및 후퇴를 유도한 페르와네는, 친정에 나선 [[아바카 칸]]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후 아바카 칸은 동생 콩쿠르타이를 총독으로 봉하였고, 케이휘스렙은 그와 함께 몽골-셀주크 지배에 저항하는 튀르크멘 제후들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특히 클르츠 아르슬란의 딸과 결혼한 지므리[* 그는 아나톨리아에서 최초로 튀르크어를 공용어로 정하는 등 (페르시아화된 셀주크 조와 달리) 튀르크멘 속성을 보였다]는 [[카라만 왕조]]의 지원 하에 아나톨리아 중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카라만 조의 메흐메트 베이가 붙잡혀 처형된 후로도 그는 [[아프욘카라히사르]]에서 항전하였다. 이에 재상 파크레틴 알리가 출정하여 지므리를 붙잡아 화형에 처하였고, 그 시신에 짚을 채워넣은 후 경고의 의미로 당나귀 등에 실어 전국에 조리돌림하였다. 이후 아프욘카라히사르는 파크레틴 알리 (사힙 아타)의 개인 영지가 되었다. == 처형된 술탄 == 1282년 총독 콩쿠르타이와 케이휘스렙은 베이셰히르의 에쉬레츠 후국을 원정하던 중, 아바카 칸의 부고에 회군하였다. 이어진 내전에서 콩쿠르타이는 형제인 아흐마드 테쿠데르 칸을 지지했으나, 후일 조카 [[아르군 칸]]의 편으로 전향하였다. 콩쿠르타이를 의심한 테쿠데르의 사위이자 조지아 총독 알라니크는 1283년 말엽 콩쿠르타이를 [[카라바흐]]로 소환, 목을 부수어 처형하였다. 이때 제후로서 콩쿠르타이를 따라간 케이휘스렙 역시 공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1284년 3월) 그후 테쿠데르는 왕위를 주장하던 케이케우스 2세의 아들 [[메수트 2세]]를 술탄에 봉하였다. [[분류:룸 술탄]][[분류:폐위된 군주]][[분류:참수된 인물]][[분류:1259년 출생]][[분류:128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