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Battle-of-qohor-animated-history.jpg|width=500]] Battle of Qohor / Three Thousand of Qohor [[얼음과 불의 노래]]의 과거 사건. [목차] == 개요 == [[피의 세기]]에 [[코호르]] 앞에서 있었던 전투로 [[도트라키]]의 불패신화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이자 [[거세병]]의 명성을 높인 전투. == 배경 == [[발리리아의 멸망]] 이후 [[피의 세기]]때 [[도트라키]]는 주변의 도시와 국가들을 닥치는대로 정복하고 약탈했으며 잔인하기로 유명한 칼 테모가 이끄는 2만 5천명의 칼라사르는 서부 진출을 위해 자유도시 [[코호르]] 앞까지 몰아닥쳤다. 코호르인들은 이에 대비해 성벽을 높이고 주둔군을 2배로 늘린 뒤 저명한 용병단인 [[둘째 아들들]]과 눈부신 깃발단을 고용했으며 동시에 [[아스타포]]에 사절단을 보내 [[거세병]] 3천 명을 구매했다. == 전투 == 첫째 날 전투에서 도트라키는 5천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코호르 주둔군은 거의 궤멸해 버렸고 두 용병단은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도주해 버렸다. 도트라키들은 먹고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거세병 3천 명이 도달하였고 다음날 새벽 성문 앞에 대열을 갖춘 채로 도트라키들을 맞았다. 도트라키들은 이들의 숫자를 우습게 여기고 돌진으로 응전했다. 총 18번의 돌격과 3번의 화살 세례가 있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5b247caf5bd47d60ec5e7f570870f1cb096c2a1ae4df41bd34e14c98ba771834.jpg|width=300]] 전투 결과, 거세병은 2천 4백명이 전사하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음에도 도시를 지켜내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도트락 군대는 1만 2천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칼라사르의 절반 정도가 전투원이니 전투원의 절반이 죽은 셈이다. 무엇보다 총지휘관인 칼 테모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그의 의형제이며 최고의 용사들인 혈기수들마저 전부 죽었다. 새로운 칼은 패배를 인정하는 의미로 부하들과 함께 거세병들 앞에 자신의 머리를 한 움큼씩 잘라서 놓고 물러나게 하였다. 이 전투로 거세병의 명성이 사방에 알려졌으며 동시에 도트라키의 불패신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로 코호르의 도시 경비는 전적으로 거세병에게 맡기고 있으며,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인지 그들 하나하나가 창 끝에 사람의 머리카락을 땋아 만든 장식을 달고 있다고 한다. 얼음과 불의 노래 본편에선 [[조라 모르몬트]]가 [[대너리스 타르가르옌]]에게 거세병을 구입하기를 권하며 이 이야기를 한다. == 여담 == * 실제 역사에서도 용병들이 고용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례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 용병]]들이 보여준 모습으로 [[1792년 8월 10일 봉기]]당시 자신들의 고용주였던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모두 목숨을 바쳐 싸운 일화나[* 루이 16세는 그들이 성난 시위대를 막지 못할것을 예감하고 "그대들은 모두 소임을 다했다. 이제 떠나도 좋다."라고 말했으나 용병들은 왕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 전멸했다.] [[카를 5세]]가 [[로마]]를 침공해 박살을 내버린 [[사코 디 로마]] 당시에 [[교황]]이자 고용주였던 [[클레멘스 7세]]를 지키기 위해 싸워 500명중 42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한 일화가 유명하다. 차이점은 [[코호르의 전투]]와는 달리 끝내 고용주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 * 실제 역사의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몽골]]은 세계를 휩쓸고 있었던 기마민족이라는 점에서 도트락인과 닮아있고, [[맘루크]] 또한 노예 아이를 데려다가 키워 만들어진 정예부대라는 점, 불패신화를 기록하던 몽골군이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볼 수 있다. [[분류:얼음과 불의 노래/역사 및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