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쿠르트 폰 슐라이허.png|width=100%]]}}}|| ||<:><-3><#00001b>'''{{{#white 바이마르 공화국의 23대 총리}}}'''|| ||||<:><#00001b>'''{{{#white 본명}}}'''||쿠르트 페르디난트 프리드리히 헤르만 폰 슐라이허[* [[국립국어원]]의 고유 명사 지침에 따르면 '폰슐라이허'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규정 용례는 띄어쓰기를 반영한 '슐라이허, 쿠르트 폰'이다.][br]Kurt Ferdinand Friedrich Hermann von Schleicher || ||||<:><#00001b>'''{{{#white 출생}}}'''||[[1882년]] [[4월 4일]],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 || ||||<:><#00001b>'''{{{#white 사망}}}'''||[[1934년]] [[6월 30일]], [[나치 독일]] [[포츠담]] (향년 52세) || ||||<:><#00001b>'''{{{#white 정당}}}'''||[include(틀:무소속)] || [목차] [clearfix] == 개요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이자 [[군인]]. == 생애 == === 정치 입문 전 ===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펠에서 육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슐라이허는 1900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해 근위 제 3 보병연대 제 5중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동료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른 부대에서는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친한 사이였다. 1913년에 참모본부에 배치된 슐라이허는 자신의 희망에 의해 [[빌헬름 그뢰너]] 중령의 철도부에 배속되었으며 그곳에서 [[프란츠 폰 파펜|파펜]]을 알게 되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대위로서 병참부대에 소속되었다가 1917년에 제 237보병사단참모가 되었다. 1918년에 소령으로 진급 후 [[독일 11월 혁명]] 당시 그가 속한 군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주도의 임시정부 협력에 찬성했다. 상관이던 그뢰너 참모차장과 SPD 당수였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오토 벨스]]는 서로 협약을 맺어 두 사람을 반란군의 손에서 구출했다. 이 협약은 과도정부의 안정과 함께 군부에게 국가 안의 국가라는 독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1차대전 후 병무국장이던 [[한스 폰 젝트]]의 측근이 되어 아들 오스카를 통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개인적 신뢰관계를 쌓은 슐라이허는 독일군 내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 정치 입문 후 === ====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차관 ==== 1929년에 국방차관으로 취임하였고, 1931년에는 종형제의 미망인이던 폰 헤닝 장군의 딸이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 바이마르 공화국 국방장관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36-B0228%2C_Kurt_von_Schleicher.jpg|width=200]][br]1932년의 슐라이허|| 1932년에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가 세계 대공황의 선후처리를 위해 경제정책을 손대자 사회주의적이라며 슐라이허는 반대했는데 나치의 [[돌격대]]가 대두되자 돌격대 금지령을 둘러싸고 상사였던 그뢰너 국방장관과 마찰을 빚자 그뢰너를 사직시켜 브뤼닝 내각은 큰 타격을 입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잃은 브뤼닝 내각은 퇴진하여 슐라이허는 후임 총리로 오랜 지기였던 파펜을 추천했다. 파펜을 추천한 이유는 오랜 지기일 뿐만 아니라 멍청했던 파펜을 자신이 조종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 파펜 내각에서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슐라이허는 8월에 나치의 총리이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부총리직을 제시하면서 여당으로 끌이들이려 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 사회민주당의 오토 브라운이 수반으로 일하던 프로이센 주 정부를 [[프로이센 쿠데타]]로 해산시키고 정부를 지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펜의 정치능력과 인기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고 9월에 불신임결의가 통과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파펜은 의회를 정지시키기 위해 탈법적인 의회 해산과 군부를 이용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슐라이허는 파펜이 망했다고 생각하고 이 계획을 거부하면서 결국 파펜을 실각시켰다. 파펜이 물러나지 않으면 내전이 터질 수도 있다는 사실상의 협박으로 12월 3일에 슐라이허는 신임 총리로 취임했다. 파펜의 실각 후 슐라이허는 나치당에 연대를 제안했지만 결과는 슈트라서만 해외로 쫓겨나고 끝났다. 군부의 자금원조와 신문에 의한 원조에도 불구하고 슐라이허 정권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우익에선 {{{#red '''"붉은 장군"'''}}}이라며 경멸했고 좌익에서는 프로이센 쿠데타에 의해 “반동주의자”라 찍혀서 사실상 [[공공의 적]]이 되어버려 우왕좌왕했다. 당시 독일에는 [[이오시프 스탈린|강철의 대원수]]에 의해 [[소련]]에서 쫓겨난 [[레프 트로츠키]]가 있었는데 트로츠키조차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을 정도로 그는 우왕좌왕했다.[* 공산당에 손을 내밀었다가 우파에다가 손을 내미는 둥 한마디로 개판 그 자체였다. 트로츠키의 표현에 의하면 '군복을 입은 물음표' 였다고.] ==== 실각 ==== 한편 슐라이허에게 실각당한 파펜은 히틀러와 접촉해 이들은 1933년 1월에 은행가의 중개로 두 차례의 극비회담을 가졌다. 1월 22일 회담에서는 슐라이허의 옛 친구이던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와 은행가, 대통령 비서실장인 [[오토 마이스너]]도 히틀러 같은 인물을 왜 총리에 임명하지 않느냐고 힌덴부르크를 설득했고, 여기에 국가인민당도 참여하는 형태로 슐라이허의 포위망이 형성되어 사면초가가 된 슐라이허는 1월 28일에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담에서 사직을 권고받은 후 '''히틀러를 차기 총리로 한다는 힌덴부르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나는 이미 무덤에 한 발을 디디고 있다. 후에 천국에 가서도 이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슐라이허는 "그런데 각하, 이 배신 후에는 각하께서 천국에 가시게 될지 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그렇게 쫒겨난 슐라이허는 여전히 독일군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였기 때문에 그를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다. === 최후 === 결국 1934년 6월 30일에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일으킨 숙청, 일명 [[장검의 밤]] 사건으로 신혼 집에서 부인과 함께 총에 맞고 죽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중장[* 총리에 취임하면서 전역했고,(국방장관은 겸임)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이 겨우 상급대장이었다.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군비 제한으로 군의 규모가 축소된 터라.]였고,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마켄젠]]이 장군참모협회에서 히틀러에 대한 비난 연설을 했지만 히틀러가 프로이센 토지를 주자 입을 다물었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던 가정부는 다음 해에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론 자살로 발표되었고 2년 후에는 슐라이허가 [[에른스트 룀]]과 손잡고 반역을 일으키려는 꿍꿍이가 있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히틀러가 집권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독일에서 까인다. == 대중매체 == * [[Hearts of Iron]]의 대체역사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독일 제국이 1차세계대전에 승리해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지 않아 장검의 밤 또한 일어나지 않았기에 살아있다. * [[Hearts of Iron IV]]의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카이저라이히]]에서는 1.0 정식 업데이트 이후 1936년 제국수상 후보로 등장하며, 개별 루트가 존재한다. [각주] [[분류:독일의 귀족]][[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분류:1882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군인 출신 정치인]][[분류: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