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요미우리 자이언츠/간략(코칭스태프))] ||
'''{{{#fa5a1e 쿠와타 마스미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요미우리 자이언츠 1라운드 지명선수)] ---- ||<-4>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width=70]] [[파일:2002 JS 우승로고.png|width=70]][br]'''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89년 일본시리즈|{{{#fd5a1e 1989}}}]]''' || '''[[1994년 일본시리즈|{{{#fd5a1e 1994}}}]]''' || '''[[2000년 일본시리즈|{{{#fd5a1e 2000}}}]]''' || '''[[2002년 일본시리즈|{{{#fd5a1e 2002}}}]]''' || ---- ||<-5>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f8f2d, #3fb1e5)" [[일본프로야구|[[파일:NPB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87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 상}}}'''}}} || || [[키타벳푸 마나부]][br]([[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노 유타카]][br]([[히로시마 도요 카프]]) ||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9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 || [[후루타 아츠야]] [br]([[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토마스 오말리 [br] ([[야쿠르트 스왈로즈]]) ||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8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베스트 나인 }}}''' || || [[키타벳푸 마나부]][br]([[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오노 가즈유키[br]([[주니치 드래곤즈]]) ||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87, 198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키타벳푸 마나부]][br]([[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니시모토 다카시]][br]([[주니치 드래곤즈]])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9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 [[니시모토 다카시]][br]([[주니치 드래곤즈]])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사이토 마사키]][br]([[요미우리 자이언츠]])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9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사이토 마사키]][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br][[이마나카 신지]][br]([[주니치 드래곤즈]])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94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br][[이마나카 신지]][br]([[주니치 드래곤즈]])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사이토 마사키]][br]([[요미우리 자이언츠]])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1997, 199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 [[사이토 마사키]][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우에하라 고지]][br]([[요미우리 자이언츠]]) || ||<-5>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auto&height=20]]]] '''{{{#ffffff 2002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 || || 노구치 시게키[br]([[주니치 드래곤즈]]) || → || '''쿠와타 마스미'''[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우에하라 고지]][br]([[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45]]]][br] '''{{{#ffffff 1987, 2002년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 ---- || [[센트럴 리그|[[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width=45]]]][br] '''{{{#ffffff 1994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 ||<-2> {{{#ffffff 보유 기록(NPB)}}} || || 최다 골든글러브 투수부문 수상 || 8회 || ---- ||<-5>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18번}}}''' || || [[호리우치 츠네오]][br](1967~1984) || {{{+1 →}}} || '''{{{#fff 쿠와타 마스미[br](1986~2006)}}}''' || {{{+1 →}}} || [[스기우치 도시야]][br](2012~2018) || ||<-5> '''{{{#fff [[피츠버그 파이리츠|'''{{{#fff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52번}}}''' || || 빅터 산토스[br](2006) || {{{+1 →}}} || '''{{{#000 쿠와타 마스미[br](2007[* 2007년 스프링캠프 한정])}}}''' || {{{+1 →}}} || 프랜퀼리스 오소리아[br](2007~2008) || ||<-5> '''{{{#fff [[피츠버그 파이리츠|'''{{{#fff 피츠버그 파이리츠}}}''']] 등번호 18번}}}''' || || [[스티브 피어스]][br](2007) || {{{+1 →}}} || '''{{{#000 쿠와타 마스미[br](2007)}}}''' || {{{+1 →}}} || 제이슨 마이클스[br](2008) || ||<-5> '''{{{#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fe5a1d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번호 73번}}}''' || || 미사와 코이치[br](2017~2020) || {{{+1 →}}} || '''{{{#fff 쿠와타 마스미[br](2021~)}}}''' || {{{+1 →}}} || 현역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쿠와타 마스미.jpg|width=100%]]}}} || ||<-2> '''{{{#fd5a1e 요미우리 자이언츠 No.73}}}''' || ||<-2> '''{{{+2 쿠와타 마스미}}} [br] 桑田真澄 | Masumi Kuwata''' || || '''생년월일''' ||[[1968년]] [[4월 1일]] ([age(1968-04-01)]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 '''출신지''' ||[[오사카부]] [[야오시]] || || '''학력''' ||[[PL학원고등학교]] (오사카) - [[와세다대학]] 대학원 석사[* 스포츠과학전공. ][* 고졸 출신이지만,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각 대학이 대학졸과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한 경우, 각 대학의 개별 입학 자격 심사에 통과한 사람은 대학원 응시 자격이 있어 대학원 입시가 가능해진다. 일본 학교교육법 제102조 1항엔 "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제83조의 대학을 졸업한 자 또는 문부과학대신이 정한 바에 따라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한다.단, 연구과의 교육연구상 필요한 경우에는 해당 연구과와 관련된 입학자격을 석사학위 또는 제104조제1항에서 규정하는 문부과학대신이 정한 학위를 가진 자 또는 문부과학대신이 정한 바에 따라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와세다대학은 스포츠과학연구과의 출원자격으로 국가대표 등 정상급 실적 3년 이상, 스포츠 비즈니스 관련 기업 등에서의 5년 이상 실무 경험 등을 갖추고 있었기에, 프로야구 선수 출신인 쿠와타의 입학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 '''신체''' ||174cm, 80kg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우타]] || || '''프로입단''' ||1985년 드래프트 1라운드 (요미우리) || ||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6~2006)'''[br][[피츠버그 파이리츠]] (2007) || ||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주임코치 보좌 (2021)[br]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주임코치 (2022) [br][[요미우리 자이언츠]] 팜 총감독 (2023) [br]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 감독 (2024~) || || '''응원가''' ||[[https://youtu.be/XqbSe7KAy-I?t=54|요미우리 시절]][* '''サンサンササン サインはV Vは勝利だビクトリー エースナンバーよく似合う 桑田 桑田 桑田'''(산산사산 사인은 V V는 승리다 빅토리 에이스 넘버가 잘 어울리는 쿠와타 쿠와타 쿠와타]|| [목차] [clearfix] == 개요 == [[파일:external/img.laughy.jp/default_937f3dbab76017c42232ef08d5bf077c.jpg]] >야구에서는 위기 상황에 대타나 중간계투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그러지 못한다. [[일본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우완 [[투수]]. 고교 시절부터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KK 콤비'를 이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에서 활약한 것으로 유명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NPB에선 오로지 요미우리 한 팀에서만 활약했다. 2006년에는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으며, 2007년에는 불혹의 나이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입단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 [[해설자]], 야구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는 중인데, 일본 아마추어 야구계의 통념이나 관습 등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는 목소리로도 주목받고 있다. == 프로 입단 전 == [[파일:external/www.japantimes.co.jp/fl20100905x1e.jpg]] 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 여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학제 개혁 후 최연소 우승투수의 기록을 세웠으며, 1학년 투수가 팀을 준우승까지 이끈 건 여러 차례가 있었지만, 우승으로 이끈 건 그가 처음이었다. 198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와 여름 고시엔 대회는 모두 준우승. 198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 4강, 여름 고시엔 대회는 우승하였다.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기도 힘든 고시엔 대회를 격전지인 오사카 지구에서 살아남아 무려 5번이나 출전하여 고시엔 통산 20승 3패를 기록했다. 학제 개혁 이후 고시엔 대회 최다승 투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타격 역시 뛰어나 KK 콤비를 이룬 기요하라의 뒤를 이은 고시엔 대회 통산 홈런 기록 2위(6홈런)를 가지고 있다. == 드래프트 지명 == 1985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원래 요미우리에서는 1순위로 고교 동기생 기요하라를 고려하고 있었고 쿠와타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게 된 건 쿠와타였다. 이에 격분한 기요하라는 크나 큰 배신감에 치를떨었고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세이부 라이온스]]의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이 당시 기요하라가 쿠와타를 손 봐주겠다며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기요하라의 성격을 아는 동급생들이 분노한 기요하라를 달래기 위해 배팅볼을 던져 주었다는 [[썰]]이 있다.] == 프로 입단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ee0811a484154153cf331bf9f68ef2f6.jpg]] 1986년 데뷔 시즌에는 수비와 타격 능력도 좋아 야수 전향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투수를 선택했다.[* 실제로 통산 타율 2할1푼, 통산 192안타 79타점 7홈런으로 투수치고는 상당한 타격 실력을 자랑한다. 이 정도면 대타 요원으로 써도 될 수준.]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으며, 2년차인 1987년에는 15승 6패, 방어율 2.17의 성적을 기록하며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획득 및 [[사와무라상]] 선정의 영광을 안았다. 10대의 나이에 두자리수 승리를 기록한 건 팀 선배 [[호리우치 츠네오]] 이후 처음이었다.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되었다. 1989년 시즌은 한 시즌 개인 최다승수인 17승을 거뒀고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 킨테츠에게 3연패 후 4연승한 리버스 스윕 시리즈다.]. 1992년 시즌까지 6시즌 연속 두자리수 승수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부진에 빠져 야수 전향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1994년에는 14승 11패, 방어율 2.52, 탈삼진 185개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 '국민적인 이벤트' [[10.8 결전]]에서 다른 '세 기둥'인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의 뒤를 이어 구원 등판해 요미우리의 승리를 확정짓고 헹가레를 받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투수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 이 둘은 요미우리의 에이스 넘버인 등번호 18번의 계보를 이었다.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를 거쳐 FA로 이적한 [[스기우치 토시야]]가 은퇴 전까지 달았다.]는 그때가 쿠와타의 "투수로서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95년 6월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플라이볼을 직접 잡다가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미국에서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1996년은 재활로 인해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개점휴업했고, 1997년에 복귀해 10승 7패 방어율 3.77로 부활하였다. 1998 년에는 9년만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됐으며, 16승을 기록해 1승차로 [[가와사키 겐지로]]와의 다승왕 경쟁에서 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본격적인 하락세가 시작되어 1999년은 8승 9패 5세이브, 2000년은 5승 8패 5세이브, 2001년은 4승 5패 2세이브의 성적을 거뒀다. 세이브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선발 뿐 아니라 구원이나 중간계투로 등판하는 횟수가 늘었다.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에서 물러나고 [[하라 다쓰노리]]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2년, 쿠와타는 사실 전 해에 은퇴를 결심했지만 하라 감독의 설득을 받고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재기에 성공해 12승 6패 방어율 2.22를 기록했으며, 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 달성 및 15년만의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같은 해 팀의 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2003년은 5승 3패 방어율 5.93, 2004년은 3승 5패 방어율 6.47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하라 감독의 후임인 호리우치 감독에게 은퇴 권고를 받기도 했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2005년은 무승 7패 방어율 7.14를 기록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본보기 역할을 기대한다는 이유로 2006년 현역 계속이 정해졌다. 2006년에는 통산 173승이자 마지막 승리를 기록했지만[* 4/13 히로시마전. 이날 이승엽은 당연히 4번타자로 출장했으나 4타수 무안타로 삽을 신나게 펐다. [[다카하시 요시노부|3번타자]]와 [[고쿠보 히로키|5번타자]]가 훗날 요미우리 감독, 일본국대감독을 지냈다.], 주루 도중 발목 부상을 당했고 결국 1군에서의 더 이상 그가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2006 시즌 종료후 21년간의 요미우리 생활을 마감하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 도전의사를 표명했다. == 메이저 리그 도전 == [[파일:external/marinerds.com/Kuwata-Matsui.jiji.jpg]]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 여담으로 뒤에 보이는 양키스 타자는 같은 일본인 선수이자 요미우리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마쓰이 히데키]]다.] 2006년 12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개막전까지 메이저리그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시범 경기에서 베이스 커버 도중 주심과 충돌해 오른쪽 발목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트리플 A팀인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재활했으며, 재활을 마치고 2007년 6월 9일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됐다. 6월 10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 전에서 무려 3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을 했다. 승격 초기에는 패전 처리로 등판하다가, 짐 트레이시 감독이 중간 계투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시절부터 지적된 구위 저하에 쿠와타 최대의 무기인 컨트롤도 통하지 않아 19경기 등판 0승 1패, 방어율 9.43으로 부진해 팀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2008년 1월 8일 다시 피츠버그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구단 구상에서 벗어나 메이저 승격은 좌절. 결국 귀국 및 은퇴 의사를 밝혔다. == 은퇴 후 == [[파일:external/www.city.katsushika.lg.jp/kuwata.jpg]]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고교야구의 대스타였지만 일본식 야구관이나 일본 야구계의 통념에 비판적인 의견을 자주 내비쳤다. 2013년에는 [[아사히 신문]] 칼럼을 통해 [[체벌]]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며, 체벌과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지도자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고루한 체육 지도자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에서 나타나는 투수 혹사를 막기 위해 투구 수 제한이나 엔트리 확대와 같은 개선 방안을 제언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더 강도 높게 이른바 일본 야구의 정신적 토대라고 일컬어지는 "야구도"를 전면 비판했다.[[https://news.joins.com/article/19760527|#]] 야구도를 단순히 일본 야구의 정신적 요소로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상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짚었다. [[러일전쟁]] 등 일본의 팽창과 그 과정에서 겪은 서구 열강과의 대립을 겪으며 1900년대 초 일본의 사회지도층 일각에서 미국의 '외래 스포츠'인 야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이 늘어났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군국주의와 반서구 감정이 강해지자 야구통제령 등이 내려지는 등 야구에 대한 의구심과 탄압이 거세졌다. 이에 발맞추어 토비타 스이슈 같은 야구인들이 당대의 [[국수주의]], [[군국주의]]적 시선에 맞추어 소위 [[무사도]], 사무라이 정신 등을 야구에 욱여넣어 야구를 일본적인 특성을 지닌 무언가로 포장해 당대 지배층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어낸 철학이 '야구도'의 본질이라 분석했다. 이런 야구관은 나름 지배층의 탄압의 가능성으로부터 야구계를 지키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지만 규율과 정신력 강화의 미명 하에 행해지는 비과학적인 훈련, 혹사, 체벌과 폭력적 위계관계라는 암부도 만들어냈다. 논문 말미에는 이런 철지난 야구관을 대체하는 스포츠맨십과 과학적 훈련법에 기반한 새로운 야구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앞서 2010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수석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정확히는 와세다대 대학원 1년 석사 과정] 석사 논문으로 "야구도를 재정의함을 통해 일본 야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그해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책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 대중본질이 낸 것. 주로 평론가, 해설가로 활동하고 간간히 아마추어 야구의 순회 지도자로 일했지만 2021 시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에 임명되면서 13년 만에 프로야구계, 더욱이 친정인 자이언츠에 복귀했다. 보직은 1군 투수 주임(chief) 코치 보좌이다. 그간 차기 감독은 현 2군 감독으로 현장에 있는 [[아베 신노스케]]와 전임감독 [[다카하시 요시노부]] 사실상 둘의 경쟁으로 여겨졌었는데, 이 둘의 대선배인 구와타가 오랜 공백을 깨고 현장에 복귀한 것. 이로써 하라 현 감독의 후임 자리를 놓고 더욱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요미우리의 감독순혈주의 전통을 깨고 1군 감독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쿠와타는 NPB시절엔 오로지 요미우리 유니폼 외에 다른 유니폼은 안입었지만, [[마쓰이 히데키]]나 [[우에하라 코지]]처럼 메이저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경력으로 완전 순혈로 보기엔 애매하기 때문이다.] 2022년부턴 미야모토 카즈토모의 후임으로 투수 주임 코치로 부임했다. 하지만 현장 복귀 이후 요미우리 마운드의 붕괴를 막지 못한 책임자로 몰리며 평론가 시절의 좋았던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다. 그나마 2021년엔 코치 보좌라는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낮은 입지 때문에 투수 코치였던 미야모토 카즈모토가 주로 비판을 받았지만, 미야모토가 물러나며 정식으로 코치가 된 2022 시즌에 계투진이 무너지고 6일 로테이션을 5일 로테이션으로 바꾼 뒤 선발진도 흔들리면서 팀 성적이 5위까지 떨어지자 본격적으로 쿠와타의 지도력이 도마 위에 올라간 상황. 요미우리의 5일 로테이션은 전년도인 2021시즌 후반기에도 성적 상승세를 가속화하기 위해 도입했지만, 오히려 투수진의 피로 누적으로 8월 말에 잠시 1위를 찍은 뒤 그대로 승패마진 -1로 3위까지 추락해 대실패로 입증된 바 있었다.[* 다만 이 해 요미우리의 추락은 투수진 붕괴뿐만이 아닌 부상자의 속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고정적인 선수 기용, 타선의 집단적 약화 등 팀의 전체적인 문제점들이 후반전이 흐를수록 누적되다 시즌 막판인 9월 이후 폭발했던 것이 컸다.] 그럼에도 전혀 배운 게 없다는 걸 보여준 셈. 결국, 2023 코칭스태프진 발표 때 팜 총감독으로 배치전환되면서 사실상 좌천되었다. == 기요하라와의 친분과 라이벌 관계 ==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유명 일화#s-2|해당 문서]] 참조 1994년 [[일본시리즈]]는 '거인 VS 세이부'라는 황금 카드[* 국내로서도 양대리그의 패자의 정상 결전에, 일본 야구계 대표 명문팀인 요미우리와 신흥 왕조 세이부의 대결, V9시절의 주역인 양 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와 [[모리 마사아키]]의 대결에 고교야구 최대의 스타인 쿠와타 대 기요하라의 대결 등 상상할 수 있던 흥행요소들이 총집결한 시리즈였다. 심지어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포스트시즌이 모조리 취소되며 갈 길이 없어진 일부 미국 야구팬들마저 대안으로 일본시리즈 중계에 눈을 돌렸을 정도였다.]였으며 양팀이 모두 2승씩을 기록한 채 5차전을 맞이했다. 거인의 선발은 그해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MVP였던 쿠와타 마스미였고, 타석에는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지탱하는 부동의 4번타자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들어섰다. 6회말 1사 거인이 5-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날 3번째 타석에 들어선 기요하라. 쿠와타는 "두 사람의 대결을 즐겨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트라이크 존 중앙으로 초구부터 스트레이트를 던졌으나 타구는 펜스를 아득히 넘어갔다. 이 날 컨디션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쿠와타는 "외야 플라이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던졌다"고 했으나 "역시나""그렇지"라고 마운드에서 납득할만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8회말 기요하라의 4번째 타석, 거인이 8-2로 더 달아나고 있었지만 쿠와타는 기요하라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볼카운트 1-2에서 던진 슬라이더를 기요하라가 다시 담장 밖으로 보내버리며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쿠와타는 "경기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기요하라와 승부에서는 2개의 홈런을 내줬기 때문에 지고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라이벌로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난 기요하라에게 체격도 기술도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기요하라에 대해 호평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팀 또는 경쟁자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큰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최대의 찬사를 선물했다. == 통산 성적 == ||||||||||||||||||||||||||||||||||<:><#000000> {{{#ffffff NPB 기록}}} || ||<#fe5a1d> {{{#ffffff 년도}}} ||<#fe5a1d> {{{#ffffff 소속팀}}} ||<#fe5a1d> {{{#ffffff 경기수}}} ||<#fe5a1d> {{{#ffffff 선발}}} ||<#fe5a1d> {{{#ffffff 완투}}} ||<#fe5a1d> {{{#ffffff 완봉}}} ||<#fe5a1d> {{{#ffffff 이닝 }}} ||<#fe5a1d> {{{#ffffff 승}}} ||<#fe5a1d> {{{#ffffff 패}}} ||<#fe5a1d> {{{#ffffff 홀}}} ||<#fe5a1d> {{{#ffffff 세}}} ||<#fe5a1d> {{{#ffffff ERA}}} ||<#fe5a1d> {{{#ffffff 피안타}}} ||<#fe5a1d> {{{#ffffff 사사구}}} ||<#fe5a1d>{{{#ffffff 탈삼진}}} ||<#fe5a1d>{{{#ffffff WHIP}}} || ||<#dcdcdc>1986||<|21><:>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 15 || 12 || 1 || 0 || 61⅓ || 2 || 1 || - || 0 || 5.14 || 64 || 19 || 57 || 1.32 || ||<#dcdcdc>1987|| 28 || 27 || 14 || 2 || 207⅔ || 15 || 6 || - || 0 || 2.17 || 117 || 52 || 155 || 1.06 || ||<#dcdcdc>1988|| 27 || 27 || 5 || 1 || 198⅓ || 10 || 11 || - || 0 || 3.40 || 174 || 71 || 139 || 1.14 || ||<#dcdcdc>1989|| 30 || 30 || 20 || 5 || 249 || 17 || 9 || - || 0 || 2.60 || 214 || 66 || 155 || 1.08 || ||<#dcdcdc>1990|| 23 || 23 || 17 || 2 || 186⅓ || 14 || 7 || - || 0 || 2.51 || 161 || 42 || 115 || 1.08 || ||<#dcdcdc>1991|| 28 || 27 || 17 || 3 || 227⅔ || 16 || 8 || - || 1 || 3.16 || 192 || 67 || 175 || 1.10 || ||<#dcdcdc>1992|| 29 || 29 || 11 || 3 || 210⅓ || 10 || 14 || - || 0 || 4.41 || 235 || 72 || 152 || 1.42 || ||<#dcdcdc>1993|| 26 || 26 || 8 || 1 || 178 || 8 || 15 || - || 0 || 3.99 || 162 || 73 || 158 || 1.25 || ||<#dcdcdc>1994|| 28 || 27 || 10 || 1 || 207⅓ || 14 || 11 || - || 1 || 2.52 || 175 || 63 || 185 || 1.09 || ||<#dcdcdc>1995|| 9 || 9 || 3 || 1 || 65⅓ || 3 || 3 || - || 0 || 2.48 || 53 || 21 || 61 || 1.09 || ||<#dcdcdc>1996|| - || - || - || - || - || - || - || - || - || - || - || - || - || - || ||<#dcdcdc>1997|| 26 || 26 || 0 || 0 || 141 || 10 || 7 || - || 0 || 3.77 || 127 || 43 || 104 || 1.16 || ||<#dcdcdc>1998|| 27 || 27 || 7 || 1 || 181 || 16 || 5 || - || 0 || 4.08 || 197 || 52 || 116 || 1.34 || ||<#dcdcdc>1999|| 32 || 22 || 2 || 0 || 141⅔ || 8 || 9 || - || 5 || 4.07 || 137 || 63 || 100 || 1.37 || ||<#dcdcdc>2000|| 30 || 10 || 0 || 0 || 86 || 5 || 8 || - || 5 || 4.50 || 103 || 36 || 49 || 1.52 || ||<#dcdcdc>2001|| 16 || 8 || 0 || 0 || 50⅓ || 4 || 5 || - || 2 || 4.83 || 56 || 23 || 31 || 1.49 || ||<#dcdcdc>2002|| 23 || 23 || 3 || 1 || 158⅓ || 12 || 6 || - || 0 || 2.22 || 138 || 43 || 108 || 1.11 || ||<#dcdcdc>2003|| 14 || 13 || 0 || 0 || 71⅓ || 5 || 3 || - || 0 || 5.93 || 92 || 20 || 46 || 1.51 || ||<#dcdcdc>2004|| 16 || 16 || 0 || 0 || 79⅓ || 3 || 5 || - || 0 || 6.47 || 100 || 33 || 39 || 1.61 || ||<#dcdcdc>2005|| 12 || 12 || 0 || 0 || 49⅔ || 0 || 7 || - || 0 || 7.25 || 65 || 30 || 34 || 1.77 || ||<#dcdcdc>2006|| 3 || 3 || 0 || 0 || 11⅔ || 1 || 1 || - || 0 || 6.94 || 19 || 1 || 5 || 1.71 || ||||||||||||||||||||||||||||||||||<:><#000000> {{{#ffffff MLB 기록}}} || ||<#000000> {{{#ffffff 년도}}} ||<#000000> {{{#ffffff 소속팀}}} ||<#000000> {{{#ffffff 경기수}}} ||<#000000> {{{#ffffff 선발}}} ||<#000000> {{{#ffffff 완투}}} ||<#000000> {{{#ffffff 완봉}}} ||<#000000> {{{#ffffff 이닝 }}} ||<#000000> {{{#ffffff 승}}} ||<#000000> {{{#ffffff 패}}} ||<#000000> {{{#ffffff 홀}}} ||<#000000> {{{#ffffff 세}}} ||<#000000> {{{#ffffff ERA}}} ||<#000000> {{{#ffffff 피안타}}} ||<#000000> {{{#ffffff 사사구}}} ||<#000000>{{{#ffffff 탈삼진}}} ||<#000000>{{{#ffffff WHIP}}} || ||<#dcdcdc>2007||<:> [[피츠버그 파이리츠|PIT]] || 19 || 0 || 0 || 0 || 21 || 0 || 1 || 3 || 0 || 9.34 || 25 || 20 || 12 || 1.90 || ||||<:> '''[[NPB]] 통산''' || 442 || 396 || 118 || 21 || 2761⅔ || 173 || 141 || 0 || 14 || 3.55 || 2641 || 890 || 1980 || 1.23 || ||||<:> '''[[MLB]] 통산''' || 19 || 0 || 0 || 0 || 21 || 0 || 1 || 3 || 0 || 9.34 || 25 || 20 || 12 || 1.90 || == 평가 == 고교 시절부터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 대회를 통해 스타덤을 탔으며, 'KK 콤비'를 이루며 함께 고교야구를 평정한 PL학원의 동기생 강타자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유명해졌다. 프로 입단 후에는 [[사이토 마사키]] ,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리며 강력한 선발진의 중심이 되었다. 통산 성적은 사이토에 살짝 밀리긴 해도 자이언츠 에이스 투수 계보를 잇는 등번호 18번은 쿠와타가 요미우리에서 활약한 20여년 내내 그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쿠와타의 입단 전 유명세나 프로에서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리그 최고의 커맨드형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교한 제구력과 이를 받쳐주는 부드러운 투구폼이 특징이었으며, 그렇다고 속구가 느린 투수였냐면 그것도 아닌게 전성기 시절엔 최고구속 150km 이상도 찍었던 선수였다. 1995년 수비 도중 팔꿈치 부상을 입은 이후 시즌아웃된 뒤 1996년은 재활을 하느라 통째로 개점휴업했는데, 이 시점에서 안타깝게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상당 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복귀 첫해인 1997년 10승, 이듬해인 1998년은 16승을 거두며 나름 선발진에서 제 몫을 했으며, 이후 수년간 부진했지만 2002년에는 12승과 2.22의 방어율로 방어율 1위 타이틀을 차지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도 했다. 2006년을 끝으로 요미우리에서 방출되었지만 이듬해 2007년, 40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데뷔까지 이뤄냈을 정도로 열정도 대단한 선수였다. 또한 투수 치고는 타격에도 상당한 강점이 있었는데, 애초에 쿠와타는 고교 시절 고시엔 홈런 기록을 세울 정도로 타격에도 재질이 있었다. 이런 뛰어난 타격 능력은 프로에서도 빛을 발해 통산 7개의 홈런과 .216의 통산 타율을 기록했으며, 타율은 NPB에서 1950년대 이후 데뷔해 500타석 이상 들어선 투수 중 가장 높다. 포지션 보정이 들어가긴 하지만 타격 WAR이 무려 두 자릿수나 된다. 수비 능력도 뛰어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NPB)|골든글러브]]를 8회 수상[* 1987, 1988, 1991, 1993~1994, 1997~1998, 2002.]했는데, 이는 [[니시모토 타카시]]와 타이를 이루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이다. [[https://youtu.be/V97j5ZTfOM4|본인 말]]로는 야구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게 수비였고 그 다음이 타격, 가장 자신 없는 부분이 피칭이었다고 한다. == 기타 == * 1985년 한미일 3국 대항 고교 야구 대회에 일본 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다. 일명 KK 콤비로 불렸던 쿠와타 마스미와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일본 대표로 출전한 유일한 대회였으며, 일본 대표팀이 4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https://www.nicovideo.jp/watch/sm5428433|대회 하이라이트 영상]] * 쿠와타가 아직 약관의 나이이던 1987~1988년 요미우리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빌 걸릭슨]]과 친해져, 걸릭슨은 아들 크레이그[* [[플로리다]] 주 카디널 뉴먼 고교에서 야구를 하면서 플로리다 주 올스타 팀에 뽑힌 적도 있지만 그 이후 야구계와 관련된 소식은 없다. 걸릭슨의 다른 5명의 자녀들도 스포츠 활동에 진출했는데, 그중 딸 3명은 모두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의 미들 네임에 '쿠와타'를 넣었다. 이전에 메이저리그 여러 팀에서 뛴 베테랑 우완이었던 걸릭슨에게 쿠와타가 투구의 기술을 자주 물었고, 나중에 늦은 나이에 메이저에 도전한 것도 이 시기에 있던 걸릭슨과의 교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1988년 6월 18일 [[나고야 구장]] 주니치전에서 7회까지 잘 던지다가 [[고카이 블루]]로 유명한 배우 [[야마다 유키(배우)|야마다 유키]]의 친아버지인 야마다 카즈토시[* 이해 홈런 2개를 쳤는데 전부 나고야 구장에서 요미우리 상대로 쳤다. 쿠와타 외에 털린 투수는 쿠와타와 동료였던 [[정민태]]와 불화가 매우 심했던 가토리 요시타카. 결국 이해 주니치의 [[승점자판기]] 노릇을 하면서 우승까지 내주고 [[왕정치]]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여담으로 둘 다 1군 데뷔 날짜가 같은데 그날은 요미우리가 주니치를 먼지나게 털어먹었고 [[야마우치 카즈히로]] 감독은 얼마되지 않아 경질되고 히로시마 우승 확정된 날 요미우리 타격 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승리 투수는 야마다의 동기뻘인 미즈노 카즈히토(現, 요미우리 자이언츠 순회코치).]에게 데뷔 첫 피홈런을 허용하고 8회에도 주니치 타선에 털리면서 패전 투수가 된 적이 있다. * 1991년의 사상 첫 [[한일 슈퍼게임]] 1차전에서 [[후루타 아츠야]]와 합을 맞춰 일본 올스타팀의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다시 말해 [[한국프로야구]]가 공식적으로 상대한 첫 [[일본프로야구]] 투수였던 셈. 1회초 한국 올스타의 1번 타자로 출장한 그 해 타격왕 빙그레 [[이정훈(1963)|이정훈]]에게 초구 안타를 허용했지만, 후속 타자들을 여유있게 처리했다. * 미국에서 팔꿈치 수술을 받았을 때 [[포도주|와인]]에 맛을 들여 와인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한다.[[https://www.sports-his.com/other/kuwata_masumi_vol3.htm|#]] 뉴질랜드에서 직접 와인 만들기를 체험하는가 하면 본인의 서명이 들어간 와인도 나올 정도. [[파일:kuwata.jpg]] * 가족 관계로는 아들 두 명이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은 가수, 모델 등으로 활약 중인 탤런트 Matt(매트)다. 본명은 쿠와타 마사시. 한국의 탤런트 [[김기수]]처럼 진하게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여러 번 해서 좋게 말해서 중성스러운, 나쁘게 말해서 성괴스러운 외모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연예인이다. 아버지보다 키도 크고([[http://life-is-art-18.com/matt/|182cm]]), 이제는 본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긴 하지만(...) 본판도 잘생긴 편. * 쿠와타도 둘째 아들의 영향으로 피부 미백에 신경써야겠다며 기초 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둘째 아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다. * 아들이 잘생긴 걸로 보면 알겠지만 쿠와타도 젊었을 때는 한 외모 했었던 선수. 함께 교진 산본바시라라고 불린 [[마키하라 히로미|마키하라]], 구와타, [[사이토 마사키|사이토]] 셋 다 젊었을 때는 건장하고 잘 생긴 외모로 인해 80년대 말~90년대 초중반 교진의 중흥기와 맞물려 그 인기가 대단했었고 50대가 된 현재도 나이에 비하면 괜찮게 외모를 유지하는 중. * [[대학원]] 동기 중에 정치인 [[나카야마 야스히데]]가 있다. * 지금은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지만, 프로야구 선수 초창기에는 일부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코시엔에서는 kk콤비로 유명해서 당대 프로야구 최고선수였던 오치아이 조차 둘의 인기를 시샘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쿠와타는 와세다대 진학한다고 공언을 한 상태라 다른 구단에서 지명을 하지 않았는데, 요미우리가 기요하라 대신 쿠와타를 지명해서 요미우리와 쿠와타가 서로 짜고 와세다대에 갈것 처럼 하면서 지명하기로 내막이 있었던 게 아니냐 그런 식의 의심을 샀다. 쿠와타는 은퇴 이후에 와세다대학원에 진학했으니 명문인 와세다대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 말고도 글러브 회사로 부터 자사 글러브를 사용하는 대신 뒷돈을 받은 것등의 해당 글러브회사의 영업사원의 사생활 폭로성 책인 <<프로야구에 작별을, 쿠와타에게 작별을>> 이라는 책이 출간 된 적이 있고, 쿠와타는 처음에는 뒷돈을 받은 것을 부정했다가 나중에 구단에 뒷돈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당시 쿠와타가 지인등에게 자신이 언제 선발 투수로 등판할 건지 귓뜸성으로 알려준 게 야구도박이나 승부조작에 관여 될 수도 있었기에 구단에서 는 1년간 근신처분을 내렸지만, 당시 감독이나 후지타 감독에 의해 몇개월 근신처분으로 끝났다. 이거 말고도 일본이 한창 버블 경기일 때 지인을 통한 부동산 투자가 실패해서 엄청난 빚을 지게 되어 그 빚의 부담이나 변제를 요미우리 구단에게 맡겨 (볼을) 던지는 부동산 업자라는 식의 조롱을 듣기도 했다. 2006년 요미우리 구단에서 퇴단을 할 때 하라 감독 등 관계자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에 홈페이지 일방적으로 게시글을 올리는 식으로 알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 고 조성민이 존경하는 선배로 쿠와타를 뽑았다. 일본에서도 이 사실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노기자카46 인기맴버였던 하시모토 나나미도 쿠와타 마스미의 팬으로 유명하다. * 95년 경기중 팔꿈치 부상을 당해 오랜 재활을 거쳐 거의 2년만에 마운드에 복귀 했을 때 엎드려 부상당한 팔꿈치를 투구판에 대는 퍼포먼스를 했는데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다. [[https://youtu.be/z3ipTDVz3jE?si=700rA3JJ4fv_70mP&t=4705]]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NPB)]]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1968년 출생]][[분류:야오시 출신 인물]][[분류:일본인 메이저리거]][[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피츠버그 파이리츠/은퇴, 이적]][[분류:PL학원고등학교 출신]][[분류:1986년 데뷔]][[분류:2008년 은퇴]][[분류:우투우타]][[분류:우완 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