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 {{{+3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 }}}[br]{{{-1 [[라틴어]]: Quintus Lucretius Vespillo}}} || ||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 || '''사망지''' ||[[로마 제국]] 로마 || || '''지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 '''국가'''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 '''가족'''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조부?)[br]투리아(아내) || || '''직업''' ||[[로마 제국]] [[집정관]] ||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9년 || || '''전임''' ||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기원전 19년 집정관)|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 || || '''동기''' || [[마르쿠스 비니키우스(기원전 19년 집정관)|마르쿠스 비니키우스]] ||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8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집정관]]. == 생애 == [[플레브스]] 가문인 루크레티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고대 역사가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진 '루크레티우스'는 기원전 133년 [[조영관]]을 맡은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로, 자기 손으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시체를 [[테베레 강]]으로 밀어넣었기에 "죽은 자의 운반자"라는 의미인 '베스필로(Vespillo)'라는 별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저서 <브루투스, 또는 유명한 웅변가에 관하여>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와 동시대에 활약한 웅변가이자 법학자인 퀸투스 루크레티우스 베스필로를 언급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19년 집정관의 조부일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49년, 그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편에 서서 사비니족의 영역에 속한 술모나 시를 7개 분견대로 지키려 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카이사르의 휘하 장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분견대가 접근해오자마자 성문을 열었고, 수비대도 카이사르 편으로 넘어갔다. 그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폼페이우스와 함께 발칸 반도로 건너갔다. 기원전 49~48년 겨울, 그는 에페이로스의 오리쿰에서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휘하 폼페이우스 함대 18척의 일부를 지휘했다. 그의 임무는 카이사르가 브룬디시움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발칸 반도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를 두려워 해 항구에서 나오지 않다가 카이사르군이 에페이로스에 상륙하자 동료 지휘관인 미누키우스 루푸스와 함께 배를 침몰시키고 폼페이우스가 있는 디라키움으로 달아났다. 기원전 48년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완패하고 동방으로 피신한 뒤 카이사르에게 귀순하고 로마로 귀환했다. 그러나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의 구성원들은 숙청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이에 대해 알게 되자 2명의 노예와 함께 로마 인근을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수도에 있는 자기 집으로 피신하기로 하고, 지하실에 한동안 숨어있다가 집에 겨우 들어왔다. 그의 아내[* 아피아노스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투리아였다고 한다.]는 그를 다락방에 숨기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호소한 끝에 남편이 숙청 명단에서 제외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기원전 19년 9월, [[마르쿠스 비니키우스(기원전 19년 집정관)|마르쿠스 비니키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