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 }}}[br]{{{-1 [[라틴어]]: Quintus Marcius Crisp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6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br][[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기원전 36년 집정관)|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기원전 36년 집정관)|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코르니피키우스]][br][[섹스투스 폼페이우스(기원전 35년 집정관)|섹스투스 폼페이우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노빌레스]] 가문인 마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일부 학자들은 [[제3차 노예 전쟁]] 때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루카니아에 주둔한 [[칸니쿠스]]와 [[카스투스]]의 노예군을 물리치기 위해 파견한 12개 코호트를 통솔해 반란군을 궤멸시킨 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가 그의 아버지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58년 이전에 [[조영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57년부터 55년까지 마케도니아 총독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기원전 58년 집정관)|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을 역임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법무관]]을 맡은 그는 내전이 발발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다. 기원전 47~46년에 레가투스로서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 [[탑수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그에게 3개의 코호트를 맡기고 타베나 시를 공략하게 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한 뒤 기원전 45년 [[비티니아]]와 [[폰토스]] 일대의 총독이 되었다. 기원전 44년 초 카이사르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에게 고전하던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3개 군단을 이끌고 그에게 가세한 뒤 카이킬리우스가 숨은 아파메이아를 포위 공격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원로원]]으로부터 아시아 총독으로 임명된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시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카시우스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카이사르를 죽인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이후 로마로 복귀한 그는 현대의 많은 학자들로부터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기원전 36년 7월 1일에 사임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기원전 36년 집정관)|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대신해 보결 집정관에 선임된 "마르키우스"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만 기록이 부족해서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