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br]{{{-1 [[라틴어]]: Quintus Minucius Ruf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가이우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조부)[br]가이우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97년 || ||<#800080> {{{#ffffff '''전임''' }}}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br][[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 ||<#800080> {{{#ffffff '''후임''' }}} ||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br][[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9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파트리키]] 가문인 미누키우스 씨족의 평민 지파인 루푸스 가문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기원전 221년 집정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를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로마 정계에 고위 행정관을 몇 차례 배출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가이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2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기원전 212년 집정관)|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휘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카푸아 공방전]]에 참여했다. 기원전 201년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와 함께 평민 [[조영관]]을 맡아 경기를 3차례 연속 개최하고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한 힁새제를 조직했다. 기원전 200년 법무관에 선임된 뒤 브루티움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로크리의 프로세르피나 신전에 침입한 강도를 조사했는데, 이 사건 조사를 위해 기원전 199년까지 법무관 직임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97년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두 집정관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원로원에 마케도니아로 갈 집정관을 제비뽑기로 뽑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호민관]]이 큰 전쟁 중에 지휘권을 빈번하게 바꿔서는 안 되니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전직 집정관으로서 계속 전쟁을 이끌게 해야 한다고 반박했고, 원로원은 이에 따라 두 집정관에게 이탈리아에 남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두 집정관은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했다. 동료 집정관 케테구스가 갈리아인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이는 동안 그는 리구리아인을 상대했다. 그는 리구리아인들의 영역 내에 있는 15개 도시를 공략한 뒤 보이족의 영토를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케테구스는 인수브레스-케노마니-보이족 연합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보이족은 루푸스가 자신들의 영역을 약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케테구스는 케노마니족과 비밀리에 접촉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 민키우스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이 완승을 거두었다. 로마로 귀환한 케테구스는 루푸스 덕분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며 공동으로 개선식을 거행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케테구스만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에 불만을 품었는지, 그는 원로원의 허가없이 알반 산에서 개선식을 임의로 개최했다가 원로원의 질책을 받았다. 기원전 189년 [[마그네시아 전투]] 후 소아시아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원로원에 의해 선임된 사절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를 포함한 사절단은 아파메이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만나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뒤이어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기원전 189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의 [[갈라티아]] 원정을 지켜봤다. 기원전 186년 로마 시내에 [[바커스]]를 모시는 비밀 의례인 바카날리아에 가담한 수천 명의 여인과 청년들이 온갖 음란한 행위를 일삼고 유언장과 인장을 위조하며, 중상 모략을 일삼고, 친척을 중독시키거나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가 원로원에 올라왔다. 이에 원로원은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 지를 놓고 회의를 벌였는데, 그는 이 회의에 출석해 당해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86년 집정관)|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에게 바커스 신도들을 모조리 체포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처형하고 나머지를 구금하도록 일임하는 결의문을 반포하는 데 동의했다. 기원전 183년 갈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하려는 갈리아인들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174년 10척의 함대를 이끌고 크라테 섬의 내전을 막으려 한 '퀸투스 미누키우스'는 다른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