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4세기 집정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4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 }}}[br]{{{-1 [[라틴어]]: Quintus Aemilius Barbul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아버지)[br][[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17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기원전 318년 집정관)|마르쿠스 포슬리우스 플라키나토르]][br][[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기원전 318년 집정관)|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베녹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기원전 317년 집정관)|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800080> {{{#ffffff '''후임''' }}} || [[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 루틸루스(기원전 316년 집정관)|스푸리우스 나우티우스 루틸루스]][br][[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기원전 316년 집정관)|마르쿠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311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br][[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기원전 312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기원전 317년 집정관)|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br][[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켄소리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집안인 아이밀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기원전 317년 집정관)|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테아나 시와 동맹을 체결했으며, 루카니아로 진군해 네우루스 시를 기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기원전 311년 가이우스 유니우스 부불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2번째로 집정관을 맡았다.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설명이 다르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은 아풀리아에서 삼니움군을 격파한 뒤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삼니움을 상대했고 바르불라는 에트루리아를 상대했다. 그는 로마에서 북서쪽에서 30마일 남짓 떨어진 [[수트리움 공방전|수트리움 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에트루리아군에 접근했다. 로마군이 접근해오자, 에트루리아군 내부에서는 "그대로 포위하고 있자"는 주장과 "평원으로 나아가 응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했는데, 결국 후자가 체택되었다. 바르불라가 수트리움 인근에 도착한 지 이틀 후, 양군이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전투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으며 양자의 사상자가 막대했다. 그러다가 로마군이 예비대를 투입하자 더 이상 전투할 여력이 없던 에트루리아군이 자기 진영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어 포위를 뚫을 수 없었고, 에트루리아군은 이듬해까지 포위를 이어갔다. 바르불라는 기원전 310년 지휘권을 신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에게 넘겨준 뒤 로마에 귀환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바르불라]]는 기원전 281년 집정관을 맡아 타라스(오늘날 [[타란토]])와의 전쟁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