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독재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독재관 및 기병장관)] ||||<#800080> {{{#ffffff {{{+3 '''퀸투스 오굴니우스 갈루스''' }}}[br]{{{-1 [[라틴어]]: Quintus Ogulnius Gal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아울루스 오굴니우스(조부)[br]루키우스 오굴니우스(아버지)[br]그나이우스 오굴니우스(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69년 || ||<#800080> {{{#ffffff '''전임''' }}} || [[가이우스 게누키우스 클렙시나]][br][[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기원전 269년 집정관)|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 ||<#800080> {{{#ffffff '''후임''' }}} ||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기원전 268년 집정관)|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소푸스]][br][[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루수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 == 생애 ==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플레브스]] 가문인 오굴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는 아울루스, 아버지는 루키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300년에 호민관을 역임하고 기원전 296년 평민 조영관을 역임한 그나이우스 오굴니우스가 있었다. 기원전 300년 형제 그나이우스와 함께 호민관에 선임된 뒤 [[폰티펙스]]와 [[아우구르]]의 숫자를 2배로 늘리고 평민도 로마 사제직을 맡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파트리키]]들은 이 법안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평민들의 적극적인 찬성 덕분에 통과되었다. 기원전 296년 형제 그나이우스와 함께 조영관에 취임한 뒤 몇몇 대금업자를 재판에 회부해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여 확보한 자금으로 [[유피테르]] 신전 꼭대기에 전차를 탄 유피테르의 동상을 세웠으며, 피쿠스 루미날리스(Ficus Ruminalis: 아기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암늑대에게 키워질 때 그늘과 은신처를 제공했다고 알려진 야생 [[무화과나무]])에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290년대 후반 전염병이 유행하자, [[원로원]]은 [[아스클레피오스]]를 에피다우로스에서 로마로 데려와야 한다는 신탁을 받아낸 후 10명의 원로원 의원을 그리스로 파견했다. 이때 그는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함께 했다. 사절들은 에피다우로스에서 아스클레피오스의 동상을 발견했지만, 너무 크고 무거워서 배로 옮길 수 없었다. 이에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뱀 한 마리가 아스클레피오스 동상의 얼굴에서 미끄러져 내려와서 도시 전체를 기어서 항구까지 간 다음 로마 선박을 타고 오굴리누스의 천막으로 올라갔다. 이후 사절단이 로마로 돌아갔을 때, 뱀이 테베레 강의 어느 섬으로 들어갔다. 원로원은 그 섬에 아스클레피오스 사원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73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 [[누메리우스 파비우스 픽토르]] 등과 함께 이집트에 파견되었다. 사절단은 로마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우호 관계 수립 임무를 완수하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부터 막대한 선물을 받은 뒤 귀국하자마자 재무부에 바쳤지만, 원로원와 민회는 임무를 잘 수행한 공을 인정하여 그들이 그 선물을 그대로 가지게 했다. 기원전 269년 [[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기원전 269년 집정관)|가이우스 파비우스 픽토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된 뒤 삼니움 지도자로서 로마에 반기를 든 롤리우스를 토벌하는 이무를 수행했다. 두 집정관은 룰리우스의 마지막 근거지가 있는 브루티움을 평정해 남부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로마의 정복을 완료했다. 기원전 257년, 시칠리아에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두 집정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세라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블라시오]]를 대신하여 라틴 축제를 주관하는 [[독재관]]에 선임되었고, [[기병장관]]으로 마르쿠스 라이토리우스 플란키아누스를 선임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