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br]{{{-1 [[라틴어]]: Quintus Fulvius Flacc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조부)[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버지)[br][[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계부)[br]호스틸리아 콰르타(어머니)[br]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형제)[br]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br]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80년 || ||<#800080> {{{#ffffff '''전임''' }}}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br][[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800080> {{{#ffffff '''동기''' }}} ||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루스쿠스]] || ||<#800080> {{{#ffffff '''후임''' }}}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79년 집정관)|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br][[루키우스 만리우스 아키디누스 풀비아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투스쿨룸 출신이었다가 기원전 4세기 중반에 로마로 이주한 뒤 여러 고위 행정관을 배출한 [[노빌레스]] 가문인 풀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기원전 264년 집정관)|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플라쿠스(Flaccus)'라는 코그노멘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로, 기원전 26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212년 법무관을 역임했다. 어머니 호스틸리아 콰르타는 남편이 사망한 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재혼했다. 형제로 기원전 190년 법무관을 맡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있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함께 헬라스로 파견되어 마케도니아 왕국에 대항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을 도시 국가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이 인물은 기원전 180년 집정관과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기원전 189년 평민 [[조영관]]에 선임되었고, 기원전 187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사르데냐의 통치를 맡았다. 기원전 181년 리구리아 총독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휘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를 맡아 승리에 일조했다. 기원전 180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계부인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에게 낙선했다. 그러나 피소는 취임한 지 2달이 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플라쿠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리비우스에따르면, 그의 어머니 호스틸리아 콰르타는 아들이 집정관 선거에 3차례 출마하여 모두 떨어진 것에 앙심을 품고 남편 피소를 독살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재판에 회부된 뒤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플라쿠스는 집정관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알비누스와 함께 리구리아를 임지로 배정받고 알프스 부족들을 복종시키고 7천 명을 삼니움으로 이주시켰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34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또다른 아들인 세르비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13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