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크로아티아의 역사)] [include(틀:나치 독일의 괴뢰국)] [include(틀:추축국)] ||<-3><:> '''{{{+1 {{{#FFFFFF 크로아티아 독립국 }}}}}}'''[br] '''{{{#fff Nezavisna Država Hrvatska}}}''' || ||<-2>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width=100%]] ||<|3>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장.svg|width=65%]] || ||<-2> {{{#fff '''국기'''}}} || ||<-2><#f5f5f5,#222>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민간기.svg|width=100%]] || ||<-2> {{{#fff '''민간기'''}}} || {{{#fff '''국장'''}}} || ||<-3> [[파일:Ndh_1941.png|width=250]] || ||<:><-3> '''{{{#fff [[1941년|{{{#fff 1941년}}}]] [[4월 10일|{{{#fff 4월 10일}}}]] ~ [[1945년|{{{#fff 1945년}}}]] [[5월 25일|{{{#fff 5월 25일}}}]] }}}''' || ||<:><-2> '''{{{#fff 성립 이전}}}''' ||<:> '''{{{#fff 멸망 이후}}}''' || ||<:><-2> '''[[유고슬라비아 왕국|{{{#fff 유고슬라비아 왕국}}}]]'''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fff 유고슬라비아 NFR}}}]][br],,,[[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fff 크로아티아 SR}}}]],,,''' || ||<:> '''[[수도(행정구역)|{{{#fff 수도}}}]]''' ||<-2>[[자그레브]]|| ||<:> '''{{{#fff 언어}}}''' ||<-2>[[크로아티아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 ||<:> '''{{{#FF0000 종교}}}''' ||<-2>[[가톨릭]]|| ||<:> '''{{{#FF0000 정치체제}}}''' ||<-2>[[입헌군주제]] [[전체주의]] [[독재]]|| ||<:> '''{{{#FF0000 국가원수}}}''' ||<-2>국왕([[토미슬라브 2세]])|| ||<:> '''{{{#fff 정부수반}}}''' ||<-2>포글라브니크([[안테 파벨리치]])|| ||<:> '''{{{#fff 통화}}}''' ||<-2>[[크로아티아 쿠나]]|| [목차] [clearfix] == 개요 == ||<-2><:><#dcdcdc,#191919> 언어별 명칭 || || [[크로아티아어]] || Nezavisna Država Hrvatska || || [[독일어]] || Unabhängiger Staat Kroatien || || [[이탈리아어]] || Stato Indipendente di Croazia || || [[헝가리어]] || Független Horvát Állam || || [[영어]] || Independent State of Croatia || 지금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대에 존재했던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헝가리 왕국]], [[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이다. == 상세 ==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한 뒤 1941년 4월 10일에 설치되었다. 이 나라는 1941년 5월 19일 로마 협정에 따른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며 이탈리아 태생의 아오스타 공([[사보이아 가문|사보이아 왕조]]의 방계 가문) 아이모네[* 3대 공작의 동생이자 4대 공작. 부인은 [[그리스 왕국|그리스]] [[콘스탄티노스 1세]]의 딸 이리니 공주(1904~1974).]를 국왕 [[토미슬라브 2세]]로 모시는 군주국으로 1943년 9월 8일에 이탈리아가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정부의 실권은 [[극우]] [[파시즘]] 조직인 우스타샤와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나치 독일|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그리고 [[헝가리 왕국(1920~1946)|헝가리]]의 공동 주권 영토였으며, 이탈리아는 이탈리아군이 통제하는 지역에서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 이탈리아의 '우리 바다'(Mare Nostrum)라는 국토 회복주의의 일환으로 중부 달마티아(구 베네치아 영토)는 이탈리아령으로 귀속되었다. 전쟁 후에는 크로아티아령 여러 섬이 되었다. 1943년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면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은 종식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통제 지역을 흡수하여 항공기, 중화기, 중장비 등을 확보하여 잠시 동안 [[옆그레이드]]. 2차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점령되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나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정권과 크로아티아계 가톨릭이 [[우스타샤 민병대]]를 이용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22만~5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당시 가톨릭계는 이를 변호하기도 했다. 반면에 크로아티아인은 [[나치 독일]]이 [[고트족]]의 후예라며 선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살을 면했고, 도리어 대다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홀로코스트]] 수용소도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필두로 한 노동수용소까지 포함하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내에 세워져 있던 것이 꽤 되었다. 유고 내전 당시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의 연방 이탈을 무력으로 저지하려고 든 것 역시 크로아티아 내부의 [[세르비아]]인이 학살당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으로부터 이탈, 독립 선포를 하자 자체 민병대까지 만들어 신생국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크닌 등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 밀집 지역을 장악하고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다.][* 실제로도 전쟁 당시 [[우스타샤]]를 롤모델로 삼은 극우 민병대가 우후죽순 생겨나 학살에 동참하기도 했다. 괜히 전후 헤이그 재판소에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한묶음 끌려간 것이 아닌 것이다.] 타 추축국 중 [[일본 제국]]과의 관계에 관해서 눈여겨 볼 부분도 조금 있다. 당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출판사였던 '벨레비트 출판사'(Nakladna knjižara "Velebit")[* 벨레비트라는 명칭은 우스타샤가 주동한 1932년의 [[https://en.wikipedia.org/wiki/Velebit_uprising|벨레비트 봉기]]에서 따왔다]에서는 친추축국 선전물을 많이 출판했는데 이들의 출판 저작물 중 크로아티아 주재 임시대리대사 미우라 가즈이치가 [[세르보크로아트어]]로 펴낸 (영어로는 A Japanese on Japan로 번역됨)이라는 책도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Independent_State_of_Croatia#cite_ref-157|영문 위키백과의 설명]] /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14690760600963248|해당 서적이 언급된 논문(英)]][* 논문 자체는 크로아티아 독립국과 타 발칸반도, [[튀르키예]] 및 일본과의 외교에 관한 논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 경제 == 나라가 지속되는 동안 크로아티아의 경제는 매우 나빴는데, 국가가 나치 독일 안감공급에 대해 전체 예산의 대부분을 부담해야 했다. 또한 전쟁중에 실질적인 윗선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가 해군력과 조선소, 철도를 비롯한 것들을 빼앗거나 마음대로 썼다. 그중 일부 지역은 지형을 이용해 농업이 발달해 그나마 나은 곳도 있었지만, 그것도 크로아티아 국민해방운동(유고슬라비아 레지스탕스의 일종)의 게릴라전술이나 지역 점령으로 인한 통제 하에 교통 노선이 막히는 등 경제적 이득에 상당한 피해를 본다. 또한 이탈리아는 자국에 부족한 자원[* 주로 [[보크사이트]]나 나무자원 등. ]을 뺏어가기도 했는데 독일이 뺏지 말라고 해도 들을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의 연간 보크사이트 생산량은 최소 50만 톤 정도였는데, 이는 독일 전체 알루미늄 수요의 무려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기에 독일에게 매우 중요했다. 전쟁 이후, 산업의 일부가 독일에 배치되었는데 전쟁 중 매우 중요한 제철소 중 한 곳이었다. 헝가리는 한 술 더 떠서 대헝가리주의를 들이대며 메지무례(Međimurje)와 바라냐(Baranja) 등지의 영토를 뜯어가 자국에 합병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측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해당 도시들이 속했던 행정구 이름을 '바라냐 교구'로 바꿔가면서까지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당 영토들은 1945년 헝가리가 소련에 패망한 후에야 돌려받을 수 있었다.[* 헝가리는 대헝가리주의를 명목으로 다른 추축국들이던 [[루마니아 왕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등을 상대로도 영토를 뜯어냈었다.] 또한 철도는 크로아티아 국영 철도로 유고슬라비아가 짓던 것을 계승해 1941년 설립했다. 도시의 주민들은 가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처했다. 수입의 증가를 동반하지 않은 높은 인플레이션이 일자 국가는 실업자에게 출근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독일의 총 근로자 수(실업률 등)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는데, 독일에 의해 강제 노동으로 끌려간 사람이 20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식량을 숨기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었고 가격 인상은 필요한 경우 심각한 상황에서만 이루어졌다. 덕분에 농민들은 제한된 가격으로 농산물 흑자를 크로아티아 국가에게 판매하는 대신 암시장에 팔았고, 많은 사람들이 총살되었다. 통화정책은 크로아티아 국립 은행에 의해 결정되었다. 1941년 7월 8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100개의 지폐로 분할된 가치인 쿠나를 통화 수단으로 도입했다. 유고슬라비아 통화였던 디나르와의 교체는 11월 1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되었고, 크로아티아 법원은 1쿠나의 가치가 금 약 17.921mg에 대응한다고 결정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슬로베니아의 역사)] [include(틀: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역사)] [include(틀:발칸의 역사/현대)] [include(틀:파시즘)] [[분류:크로아티아의 역사]][[분류:유럽의 왕국]][[분류:나치 독일의 괴뢰국]][[분류:이탈리아 왕국의 괴뢰국]][[분류:1941년 설립]][[분류:1945년 멸망]][[분류:과거의 독재국가]][[분류:파시즘 국가]][[분류:가톨릭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