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노르웨이의 역사]][[분류:나치 독일의 괴뢰국]][[분류:파시즘 국가]][[분류:1942년 설립]][[분류:1945년 멸망]] [include(틀:노르웨이의 역사)] [include(틀:나치 독일의 괴뢰국)] ||<-4><:>{{{#00205B '''{{{+2 국민정부 }}}'''[br]National Government [br]Den nasjonale regjering }}} || ||<-2><:>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150]] ||<-2><:> [[파일:노르웨이 국장.svg|width=100]] || ||<-2><:> {{{#00205B '''국기'''}}} ||<-2><:> {{{#00205B '''국장'''}}} || ||<-4> {{{#00205B '''지도'''}}} || ||<-4> [[파일: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svg|width=100%]] || ||<-4><:> {{{#00205B '''1942년 2월 1일'''}}} {{{#00205B '''~'''}}} {{{#00205B '''1945년 5월 8일'''}}} || ||<-3><:> {{{#00205B '''수도'''}}}||[[오슬로]] || ||<-3><:> {{{#00205B '''언어'''}}}||[[노르웨이어]] || ||<-3><:> {{{#00205B '''정치체제'''}}}||[[전체주의]] || ||<-3><:> {{{#00205B '''종교'''}}}||[[루터교]] || ||<-3><:> {{{#00205B '''통화'''}}}||[[노르웨이 크로네]] (NOK) || ||<-3> {{{#00205B '''역사'''}}} ||<-3>• 건국: 1942년 2월 1일 • 멸망: 1945년 5월 8일||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웨이]]에 수립된 나치의 괴뢰국이다. == 역사 == 1940년 [[덴마크]]를 침공한 [[나치 독일]]이 바다를 건너서 노르웨이 본토로 침공하면서 노르웨이 왕실과 행정부가 영국 런던으로 피신하면서[* 옆나라 [[스웨덴]]은 중립국이지만 사실 그 뒤로는 나치 독일의 원동력인 [[철광석]] 수급에 기여를 하였던 어두운 면도 있고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치 독일을 지지하는 추축국이었기에 사실상 피신할 곳이 영국 밖에 없었다. [[프랑스]]도 갈 수 있겠지만 바로 1940년 6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한다.] 노르웨이는 5년동안 나치 치하의 점령지에 들어갔다. [[비드쿤 크비슬링]]은 1940년 [[나치 독일]]이 침공할 당시 군사 반란을 일으켜서 잠깐이지만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독일에 의해 정권이 해산되었고, 독일은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를 새로운 통치 기관으로 내세운다.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인 요제프 테르보펜의 정부는 노르웨이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1942년, 테르보펜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르웨이인인 [[비드쿤 크비슬링]]에게 자치 정부를 구성하게 하여 크비슬링 정권이 수립되었다. 정식 명칭은 (노르웨이) 국민 정부다. 실제로는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내의 자치 정부였을 뿐이다. 또한 군사, 치안 업무는 여전히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의 관할이었다. 집권당은 크비슬링의 [[국민연합(노르웨이)|국민연합]]. 크비슬링 정권은 수많은 노르웨이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반항적인 인사들을 [[숙청]]하고 자국에 있는 [[유대인]]들을 독일로 보내기도 하여 노르웨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괴벨스]]가 주도한 [[나치 독일]]의 교묘한 선전으로 노르웨이인 청년 15,000명이 조국을 침략한 독일의 [[무장친위대]]에 자원 입대하기도 하였다. 전후 노르웨이 정부는 이런식으로 가담한 사람도 처벌해서 전체 인구의 무려 5%가 나치 독일 부역자로 몰렸다. 1942년 9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크비슬링에 대한 지지도를 조사하자, 노르웨이인의 95%가 크비슬링에 반대한다고 나오는 등 국민들의 크비슬링에 대한 지지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보다 못한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던 요제프 테르보펜이 크비슬링을 사실상 정치에서 배제시키고 노르웨이 주둔군 사령관 팔켄호르스트와 함께 노르웨이를 통치하였고, 이때부터는 [[게슈타포]]들이 노르웨이 경찰을 대신하게 되어 노르웨이인들의 저항이 늘어났다. 크비슬링 정권은 나치 독일로부터도 못마땅한 취급을 받았다. 집권 여당인 국민 연합은 독일에 빌붙어 있는 신세인 주제에 영토 확장 욕구를 계속 보였고,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 [[남극]], [[북극]][* 북극은 애초에 땅이 아니다(...).], [[아르한겔스크]] 등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남극에는 나치 독일이 기존의 퀸모드랜드(노르웨이령 남극)의 일부를 합병한 [[노이슈바벤란트]]가 있는데도 상관없이 계속 주장했다. 심지어 크비슬링은 [[하인리히 힘러]]에게 노르웨이의 영토를 넓혀 달라고 [[스웨덴]]을 침공해 달라고 했다. 당시 스웨덴은 대표적인 친독 중립국으로, 독일에게 군사 통행권을 주었고 철과 석탄을 공급하고 있었다. 나치독일 입장에선 안 그래도 병력이 모자란데 자신에게 호의적인 중립국까지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독일 당국은 이런 요구를 실현 불가능한 계획으로 취급했다. 1945년, 전쟁의 형세가 기울자, 다른 [[추축국]]들은 거의 모든 영토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노르웨이는 영토가 온전했다. 북동부에 있는 [[핀란드]] 접경 지역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소련군은 노르웨이 깊숙이 진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윈스턴 처칠]]이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소련이 점령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으로, 전후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 및 핀란드에서 철수해 온 독일군은 모두 연합군의 포로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노르웨이]] 망명 정부 또한 해방 지역에 상징적 의미로서 관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나치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 크비슬링은 평화적 정권 이양을 제안했고 노르웨이 레지스탕스는 받아들였으나,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약속을 깨고 정부를 폐지해서 [[노르웨이]] 정부가 다시 돌아온다. 노르웨이 왕국은 망명 정부 기간에 크비슬링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을 처형시키기 위해, 과거에 폐지되었던 [[사형제]]를 일시적으로 부활시켜 크비슬링을 비롯한 크비슬링 정권 관계자와 나치 독일 협력자들을 총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