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이집트 파라오)]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DB76B 0%, #DECD87 20%, #DECD87 80%, #BDB76B)" {{{#A0522D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8대 파라오[br]{{{+1 클레오파트라 3세}}}[br]Cleopatra III'''}}}}}}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클레오파트라 3세.jpg|width=100%]]}}} || ||<-2> '''이름''' ||클레오파트라 3세[br]Κλεοπάτρα | Cleopatra || ||<|2><-2> '''출생''' ||미상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2><-2> '''사망''' ||기원전 101년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2><|4>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2 1차}}} || ||기원전 142년 ~ 기원전 131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협치)] '''(약 11년)''' || ||이집트 파라오 {{{-2 2차}}} || ||기원전 127년 ~ 기원전 101년[* 기원전 127년 ~ 기원전 116년([[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와 협치)[br]기원전 116년~기원전 115년([[프톨레마이오스 9세]], [[클레오파트라 4세]]와 협치)[br]기원전 115년~기원전 107년([[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협치)[br]기원전 107년~기원전 101년([[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협치)] '''(약 26년)''' || ||<-2> '''부모''' ||[[아버지]] : [[프톨레마이오스 6세]][br][[어머니]] : [[클레오파트라 2세]] || ||<-2> '''배우자''' ||[[프톨레마이오스 8세]] || ||<-2> '''자녀'''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클레오파트라 4세]], [[트뤼파이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 ||<-2> '''종교''' ||[[이집트 신화|이집트 다신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8대 [[파라오]]. 생애 전반기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2세]]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고, 생애 후반기에는 자신의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 생애 ==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이다. 형제로 프톨레마이오스 유파토르, [[프톨레마이오스 7세]]를 두었고, 자매로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두었다. 기원전 145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즉위했지만, 한 달만에 숙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추대를 받아 파라오가 된 뒤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2세와 결혼했다. 1년 후 프톨레마이오스 8세-클레오파트라 2세 부부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태어났고, 프톨레마이오스 7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사주로 살해되었다. 기원전 142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3세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세웠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9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클레오파트라 4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그리고 [[트뤼파이나]]를 낳았다. 이후 알렉산드리아 궁정은 두 패로 나뉘었다. 클레오파트라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가 후계자가 되길 원했고,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기 자식들이 뒤를 잇기를 희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클레오파트라 3세 쪽으로 기울었고, 멤피테스를 파라오로 세우라는 클레오파트라 2세의 요구를 무시했다. 결국 기원전 132년 말, 양자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집트 각지에서 양자를 따르는 무리가 전투를 벌였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시가전이 벌어졌다. 기원전 131년 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2세에 호응하여 폭동을 일으켜 왕궁에 불을 질렀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3세,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키프로스로 탈출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 2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단독 파라오로 즉위하여 '테아 필로마토르 소테이라(Thea Philometor Soteir 구원자 여신)'의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지배권은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해 그리스계가 몰려 사는 도시들에 한정되었고, 이집트 원주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를 더 지지했다. 상이집트에선 이러한 혼란을 틈타 하르시에시(Harsiesi)가 반란을 일으켜 기원전 131년 8월이나 9월에 테베를 장악하고 파라오를 자칭했다. 하지만 2개월만에 테베의 스트라테고스인 파오스에게 쫓겨났다. 기원전 130년 초,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키프로스에서 이집트로 들어와 멤피스에 자리잡았다. 두 사람은 파오스를 상이집트 전체의 스트라테고스로 승진시켜 지지를 얻어냈고, 병사들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다. 그러나 도시의 수비가 워낙 강력해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전국 곳곳에 설치된 요새들의 지배권을 여전히 간직했다. 그녀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멤피테스를 알렉산드리아로 소환하여 파라오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멤피테스는 도중에 붙잡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는 일부러 클레오파트라 2세의 생일에 멤피테스의 온몸을 조각낸 뒤 그녀에게 돌려보냈다. 아들의 끔찍한 죽음에 분노한 클레오파트라 2세는 기원전 129년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이집트로 와서 구원해달라. 파라오로 세우겠다."라고 부탁했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이집트로 진군하다가 이집트로 들어가는 관문인 펠루시움 요새 밖에 진을 쳤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군대가 굳건히 버틴 데다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의 원조를 받고 자신을 안티오코스 7세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해야 했다. 이리하여 셀레우코스군의 원조마저 끊기면서, 그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기원전 127년, 클레오파트라 2세는 국고 대부분을 챙겨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하여 데메트리오스 2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리아에 입성한 뒤 클레오파트라 2세 지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기원전 124년,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에 대한 지지를 취소하고 데메트리오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티오코스 8세를 지지하기로 했다. 그는 딸인 [[트뤼파이나]]와 안티오코스 8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 2세가 이집트로 돌아오는 걸 허락했으며, 공동 파라오로 들어오는 것도 허용했다. 기원전 118년 4월,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 클레오파트라 3세는 공동으로 사면령을 발표했다. 이 법령은 기원전 118년 이전에 자행된 살인과 절 강도 이외의 모든 범죄를 사면하고, 피난민들의 귀향과 재산 환수를 장려하며, 모든 밀린 세금을 면제하고, 내전 당시 군인들에게 지급된 토지 증여를 확인하며, 절의 토지 보유와 세금 특권을 확인하고, 세무관료들에게 표준화된 무게를 사용하도록 했다. 기원전 116년 6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붕어했다. 당시 궁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9세]]보다는 차남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선호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세우라고 요구하자 받아들이고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 2세도 공동 파라오로 등극했으나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 3세는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우선 키프로스 총독에 세워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게 하였고, 여러 신하를 포섭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0세를 지지하게 하였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결혼한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 4세]]가 남편을 부추겨서 자신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들자,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에게 클레오라트라 4세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순종적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결혼하도록 강요하여 관철시켰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파라오로 등극하지 않고 정치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아 어머니를 만족시켰다. 기원전 107년 가을, 클레오파트라 3세는 자신을 모시던 하인들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이 상처들을 두루 보이며,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따르면, 이 공격은 클레오파트라 3세가 아들을 축출하기 위해 하인들을 시켜 일부러 부상입히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얼마 후 프톨레마이오스 10세가 비밀리에 키프로스를 떠나 펠루시움에 도착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왔고,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공동 파라오로 선임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9세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9세가 무사히 탈출하자 분노하여 체포 임무를 맡았던 장교들을 처형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 남겨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재혼했다. 프톨레마이오스 9세는 키프로스로 달아났지만, 클레오파트라 3세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그를 몰아냈다. 그는 다시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로 도주했고, 거기서 군대를 끌어모은 뒤 기원전 106년 키프로스를 침공하여 정복에 성공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9세와 [[안티오코스 9세]]가 손을 잡을 기미가 보이자, 클레오파트라 3세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를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 이혼시키고 [[안티오코스 8세]]와 결혼시켰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간섭에 순종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를 부당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빠져나온 뒤 군대를 끌어모아 어머니에 대항했다. 클레오파트라 3세는 두 아들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0세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기꺼이 응하겠다며 기원전 101년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왔지만, 도착한 즉시 어머니를 체포하여 파라오 직위에서 폐위시킨 뒤 처형했다. [[분류: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분류:여성 파라오]][[분류:기원전 101년 사망]][[분류:폐위된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