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루마니아의 축구 구단, rd1= CFR 1907 클루지, other2=같은 연고지의 축구 구단, rd2=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 [include(틀:루마니아의 행정구역)] ||||<#000000><:>{{{#white {{{+3 클루지나포카 (루마니아)}}}}}}|| ||<-3><:> [include(틀:지도, 장소=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Casa_Cluj.jpg]] [[페르디난드 1세|페르디난드 왕]] 거리(Bulevardul Regele Ferdinand) [목차] == 개요 == [[루마니아]]에서 인구가 3~4번째로 많은 도시로,[* 통계 시점에 따라 [[몰다비아]]의 [[이아시]](Iași), 바나트(Banat)의 [[티미쇼아라]](Timișoara/Temesvár)를 제치기도 하고, 뒤쳐지기도 한다.]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 왕국]]으로 넘어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도시의 원래 이름인 클루지(Cluj)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74년 공산 정부가 [[헝가리]] 색채를 지우고 [[민족주의]]적 의도로 [[고대 로마]]의 정착촌 이름이었던 '나포카(Napoca)'를 덧붙여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 언어별 표기 == || [[루마니아어]] || Cluj-Napoca || || [[헝가리어]] || Kolozsvár(콜로주바르) || || [[독일어]] || Klausenburg(클라우젠부르크) || == 역사 == 로마 제국의 정착지 나포카가 있던 곳이다. [[헝가리]]가 언제 이 지역을 정복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슈트반 1세]] 시기의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이미 이슈트반 1세 시기에 [[헝가리인]]이 점령한 것으로 추측된다. 1213년 'Clus'라는 이름으로 문헌에서 처음 언급되며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아들 [[이슈트반 5세|이슈트반]]이 에르데이[* Erdély.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어]].] 공작으로 있던 시기인 1275년부터 [[독일인]]을 받아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316년 [[카로이 로베르트|카로이 1세]]가 도시 헌장을 내어주었고 이때부터 많은 상공업 길드들이 창설되어 발전을 거듭했다. 16세기부터는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루터교회]] 신자가 다수 늘었으며 1570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에 귀속되었으며 1790~1848년, 1861~1867년 사이에는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에르데이 대공국]]의 수도가 되었다. 1867년, [[대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면서 에르데이 대공국은 폐지되었고 헝가리 왕국 직할 도시가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콜로주 주(Kolozs vármegye)를 창설하여 이 도시를 주도로 삼았으며 이 시기 2만여 명에 달하는 인구가 유입되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소수민족이었던 [[루마니아인]][*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인이 55%, 헝가리인이 36% 정도로 루마니아인이 더 많았으나 콜로주바르 같은 도시에서는 헝가리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은 극심한 차별을 견뎌야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는 기정사실화 되었고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 왕국]]에 할양되었다. 루마니아도 헝가리와 다를바 없이 루마니아화를 강요했으며 헝가리인이 다수를 점하는 클루지에서 루마니아 문화를 최대한 강요하는 한편 다수의 [[루마니아 정교회]] 성당을 건립하여 헤게모니 장악을 시도했다. 트리아농 조약의 굴욕을 잊지 못한 헝가리는 영토를 되찾기를 염원하였다. 당시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둘다 [[추축국]]이였으므로 [[나치 독일|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는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헝가리]]를 달래기 위해 제2차 빈 중재를 통해 루마니아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게 넘겨줬다.[* 루마니아는 추축국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동맹국가들에게 영토를 꽤나 떼어줬다. 이후 추축국에 가담한 불가리아에겐 또다시 독일 중재로 남부 [[도브루자]]까지 떼어주었다. 또한 [[소련]]의 압박으로 [[베사라비아]]를 강제로 뜯겼다. 다만 [[독소전쟁]] 발발 이후 소련이 가져간 베사라비아를 수복하고 [[트란스니스트리아]], [[오데사]] 등을 영토로 편입하면서 루마니아 역시도 영토를 챙겼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배하자 1947년 [[파리 조약]]으로 루마니아에 반환해야 했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헝가리 문화를 최대한 말살하기 위해 루마니아인의 유입을 장려하였고 이때부터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의 인구 비중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헝가리인 탄압은 차우셰스쿠 정부가 붕괴한 다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루마니아 민족주의자 게오르게 푸나르가 2004년 시장에서 물러나면서 헝가리인 탄압은 겨우 멈췄고 클루지의 경제도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 인구 비중 == 1910년에는 [[헝가리인]]이 도시 인구의 81.6%를 차지했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과반수를 차지했으나, 2011년 기준으로는 오히려 [[루마니아인]]이 인구의 81.5%를 차지한다. 단, 1910년 클루지나포카의 인구는 6만여 명에 불과했고 2011년 기준 인구는 30만 명이 넘어간다. 헝가리계 인구는 대략 5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100년 전과 헝가리인 숫자는 비슷하다. 차우셰스쿠가 헝가리 흔적을 최대한 지우기 위하여 트란실바니아로 다수의 루마니아인을 이주시킨 여파라고도 볼 수 있다. == 특징 ==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대학교인 바베슈-볼랴이 대학교(Babeș-Bolyai University)가 있는 대학도시로서 유럽에서 온 학생들이 많고, 도시가 활기찬 편이다. 바베슈-볼랴이 대학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 도시에 [[1872년]] 세운 '헝가리 왕립 페렌츠 요제프 대학(Magyar Királyi Ferenc József Tudományegyetem)'이 그 뿌리다. 1919년 이 도시가 루마니아 땅이 되자 이에 반발한 일부 구성원들은 헝가리의 [[세게드]](Szeged)에 망명 대학교를 세웠다. 1940년 제2차 빈 중재로 클루지가 다시 헝가리 땅이 되자 복귀했으나, 5년 만에 번복되면서 다시 세게드로 돌아갔고 공산화되면서 '페렌츠 요제프' 이름도 떼어져 지금의 세게드 대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이 대학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콜로주바르는 '이중제국의 [[괴팅겐]]'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대학도시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가 트란실바니아를 합병한 후 페렌츠 요제프 대학을 개조해 세운 [[페르디난드 1세]] 대학교[* 공산 정권 수립 후 빅토르 바베슈(Victor Babeș) 대학교로 개명]([[루마니아어]] 사용)와 보여이 대학교([[헝가리어]] 사용. 보여이 야노시는 19세기 헝가리의 수학자)가 합쳐져 바베슈-보여이 대학교가 된 것은 1959년. 이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개설되어 있다. == 기타 == 헝가리의 마지막 전성기를 장식한 [[마차시 1세]]가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 헝가리의 위인이나 아버지 [[후녀디 야노시]]가 왈라키아계이고 현재 클루지가 루마니아 영토임을 들먹이면서 루마니아에서도 자국 영웅으로 추대해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역사 주권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프로축구팀으로 [[CFR 1907 클루지]]와 [[FC 우니베르시타테아 클루지]]가 있다. 1994년, [[생테티엔]]와 자매결연을 맺었다. 소설 [[드라큘라]]의 [[조나단 하커]]가 [[드라큘라 백작]]을 만나러 가던 도중, 이 도시에서 머문다.(챕터1) [각주] [[분류:루마니아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