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엘란도르상 신인상 수상자)]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1 타미야 지로}}}'''[br]田宮 二郎}}}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Tamiya_Jiro.jpg|width=100%]]}}} || ||<|2> '''출생''' ||[[1935년]] [[8월 25일]] || ||[[오사카부]] [[오사카시]] [[키타구(오사카시)|키타구]] || ||<|2> '''사망''' ||[[1978년]] [[12월 28일]] (향년 43세) || ||[[도쿄도]] [[미나토구(도쿄도)|미나토구]]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일본)]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배우|영화배우]], [[탤런트]], [[사회자]]. [[오사카부]] [[오사카시]] 태생이며, 본명은 '''시바타 고로'''(柴田 吾郎) 이다. == 생애 == === 학창 시절 === 1935년 8월 25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생후 4일만에 [[스미토모 그룹|스미토모 재벌]] 중역이던 아버지를 잃었고, [[제2차 세계 대전|전쟁이 끝난 후]] 어머니를 여의는 불운을 겪은 시바타는 [[교토]]의 친척집에 맡겨져 학창시절을 보냈다. [[가쿠슈인|가쿠슈인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시바타의 당초 희망은 [[외교관]] 이었지만, 대학 재학 중이던 1955년 스포츠 닛폰이 주최한 '''미스터 닛폰 선발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계기로 [[다이에이|다이에이 영화사]]의 스카웃 제의를 받고 영화사 산하의 연기연구소 10기생으로 들어오면서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 영화배우 시절 === 1957년 본명인 '''시바타 고로'''로 데뷔했지만 [[다이에이]]의 사장 [[나가타 마사이치]]의 강권으로 이름을 '''타미야 지로'''로 개명했다. 당시 나가타가 구단주이던 프로야구단 [[다이마이 오리온즈]]의 강타자 [[타미야 겐지로]](田宮健次郎)의 이름을 본따서 그 선수만큼 스타가 되라는 의미였다. 이후 주로 단역만 맡으며 그다지 눈에 띄지 못하던 타미야는 1961년 '''여자의 훈장'''에 출연하여 영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같은 해 개봉된 '''악명 시리즈'''에서 주인공 '''카츠 신타로'''(勝 新太郎, 1931~1997)의 친구 역할로 스타덤에 오르며 1961년도 [[엘란도르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로서는 장신이던 180cm의 키에 중후한 외모와 목소리, 근육질의 몸매를 소유한 타미야는 다수의 작품에서 냉정한 엘리트부터 흉악한 [[야쿠자]]까지 폭 넓은 연기를 선보였고 1966년 처음으로 영화화 된 [[하얀거탑]][* 하얀거탑은 1965년 [[분카 방송]]의 [[라디오 드라마]]로 처음 미디어화 되었고 당시 [[자이젠 고로]] 역할 [[성우]]가 타미야 지로였다. 1967년 [[테레비 아사히|NET테레비]] 에서 최초로 TV 드라마화 했을 때 자이젠 고로는 '''사토 케이'''(佐藤 慶, 1928~2010)가 연기했다.]의 주인공 [[자이젠 고로]] 역할을 맡아 호평을 받으면서 이른바 '''[[쇼와]]의 [[쿨가이]]'''로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1965년 타미야는 동료 배우이던 '''후지 유키코'''와 [[결혼|백년가약]]을 맺었다. === 영화계 추방 === 1968년, 영화 '''불신의 시기'''에 주역으로 출연한 타미야는 영화 선전 포스터(원안)에 자신의 이름이 4번째로 기재된 것을 보고 다이에이 측에 항의했다. 회사에서는 "이 영화는 여성을 주된 소재로 한 영화이니 여배우들을 위로 올리는 것이 맞다"며 설득하려 했는데 부사장인 '''나가타 히데마사'''[*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의 아들.]가 "배우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왜 그리 말이 많아?" 라며 타미야를 몰아세웠다. 이후 타미야와 담판을 지은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은 "주역인 네가 출연진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네가 진짜로 스타인줄 아느냐? 실제로 너는 다이에이에서 세 번째 정도의 배우이다.''' 좀 적당히 해라!" 라면서 그를 질책했고 울컥한 타미야는 '''"이런 대접을 받느니 차라리 다이에이를 떠나겠다"''' 라는 폭탄 선언을 하고 말았다. 결국 타미야의 뜻대로 그의 이름이 포스터의 첫 번째 위치로 바뀌기는 했지만, 이 사건으로 분노한 나가타 사장은 다이에이와의 계약 기간이 남아 있음에도 타미야를 해고해 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영화사와 타미야를 출연시키지 말자는 협정을 맺으면서 타미야는 일본 영화계에서 추방당했다... === 방송인 시절 === [[파일:타미야_지로_퀴즈타임쇼크.jpg]] '''퀴즈 타임쇼크''' 사회자 시절.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타미야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연극배우, [[가수]], 밤무대 [[MC]]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69년 1월 [[테레비 아사히|NET테레비]]가 신설한 퀴즈 프로그램인 '''퀴즈 [[타임쇼크#s-3|타임쇼크]]'''의 초대 [[사회자]]로 발탁되어 배우 시절과는 달리 지적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로 변신하면서[* 원래 영화배우들은 영화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하여 TV에 출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1960년대 들어서는 점점 빈도가 줄어서 퀴즈 타임쇼크가 방영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영화배우가 TV에 출연하는 케이스는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타미야의 TV 쇼 고정 출연은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영화배우 시절보다 더 높은 인기를 끌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타미야는 10년 가까이 퀴즈 타임쇼크의 장수 사회자로 활약한 후, 1978년 9월에 같은 배우인 '''야마구치 타카시'''에게 후임 MC 자리를 물려주고 프로그램을 떠났다.] 퀴즈를 출제할 때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외치던 멘트인 '''"타~임 쇼크!!"'''는 한때 [[유행어]]가 된 적도 있다. 그 외에 [[테레비 도쿄|도쿄 12채널]] '''타미야 지로 쇼''' 등의 버라이어티 쇼 MC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 === 연기자 복귀, 그리고 [[하얀거탑]] === 1969년 6월, [[다이에이]]와의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의 몸이 된 타미야는 [[토에이]]의 제의를 받고 '''일본암살비록'''의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 복귀했다.[* 이 무렵, 자신을 [[다이에이]]에서 쫓아내는 것에 한몫 한 나가타 히데마사 부사장을 만나게 된 타미야는 왜 나를 내보냈냐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참고도 다이에이는 TV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영화계의 불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1971년 도산했다(...).] 1971년 자신의 개인 프로덕션인 '''타미야 기획'''을 설립하여 아내인 후지 유키코가 사장으로 취임했고, 첫 작품으로 타미야 자신이 제작 겸 주연한 '''3000km의 함정'''을 내놓았지만 신통한 반응은 얻지 못했다(...). 1972년 [[TBS 테레비]]의 [[드라마]] '''알지 못하는 동지'''에 출연하며 TV [[탤런트]]로 전업했고, 이후 '''하얀 그림자''', '''하얀 활주로''' 등 이른바 '''하얀 시리즈'''와 '''고원에 어서오세요''' 등 여러 화제작의 주연으로 선 굵은 연기를 보이면서 타미야는 인기 탤런트로 발돋움 했다. [[파일:자이젠_사토미.jpg]] [[후지 테레비]] [[하얀거탑]]에 [[자이젠 고로]] 역할로 출연한 타미야(우측). 왼쪽은 [[최도영|사토미 슈지]] 역의 '''야마모토 가쿠'''(山本 學). 1977년 11월, [[후지 테레비]]가 판권을 사들인 [[야마사키 토요코]] 원작 [[하얀거탑]]의 드라마화가 확정되었고, 타미야는 주역 [[자이젠 고로]] 역할로 캐스팅 되었다. 이미 1966년판 영화에 같은 역할로 출연했던 타미야는 자이젠 역할에 유난히 애착을 가지며 열연하였고,[* 타미야가 자이젠에 대해 호감을 가진 이유는, 이름이 자신의 본명과 같은 '''고로''' 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노가시라 고로|???]]. 귀가 가려운데?~~] 직접 야외촬영 할 병원을 섭외하러 다니는 열성까지 보이며 드라마의 시청률은 나날이 상승하면서 순조롭게 방영되었다. '''그런데...''' === [[양극성장애|조울증]] === 평소 사업에 관심이 많던 타미야는 '''"일본의 [[하워드 휴즈]]가 되겠다"''' 라며 공언하면서 연기 활동 와중에 정재계 인사들과 접촉하고 골프장과 맨션 사업을 벌였지만 모조리 실패했고, 1973년 [[영국]]과 합작하여 제작한 영화 '''Yellow Dog'''마저 [[망했어요|폭망]]하며 거액의 [[빚]]을 떠안고 말았다. 이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으로 타미야는 [[양극성장애|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이 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약물 치료도 거부하여 아내가 그를 설득시키려고 적지않은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엎친데 덮친다고]], 타미야는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 증세까지 와서 매니저에게 발모제를 사오라고 시키거나 드라마 촬영 중 머리가 젖지 않도록 유난히 신경썼다고 한다(...).] 그 와중에 타미야가 주연한 [[하얀거탑]] 첫 화는 1978년 6월 3일 방영되어 시청률 18.6%로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타미야의 조증이 심해지며 드라마 촬영 도중 기분이 들떠서 제멋대로 현장을 이탈한다던가 심지어 뜬금없이 "[[우라늄]] 채굴 사업권을 받았다"며 휴가를 얻는 바람에 촬영이 갑자기 일주일 정도 중단되는 등, 스태프들의 속을 썩히기도 했다.[* 게다가 타미야 기획에도 타미야의 불륜 사실을 퍼뜨린다던가, 드라마의 홍보를 해준다는 등의 명목으로 금품을 뜯어내려는 사기꾼들의 연락이 빗발쳐서 [[경시청]]에 수사를 의뢰한 적도 있다. 결국 전부 입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사업 실패로 진 빚의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아내와 위장[[이혼]] 까지 하는 아픔을 겪었다. 드라마가 총 31회 중 18회 분량까지 촬영된 시점에서 제작진은 1개월 간 휴가를 갖기로 결정했고, 타미야는 기분을 전환하려 7월 29일 부터 9월 8일 까지 [[런던]]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타미야는 여행 도중 런던 현지에서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 받은 [[모발이식]] 수술이 실패한 데다가 부작용으로 [[편두통]]까지 생기는 바람에 그의 정신 상태는 거꾸로 극도의 우울증으로 악화되었다. ~~병 고치러 갔다가 병만 더 키워서 왔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타미야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대사도 외우지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하는 통에 촬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지만, 아내와 제작진, 그리고 '''야마모토 가쿠'''([[최도영|사토미 슈지]] 역), '''타이치 키와코'''([[강희재|하나모리 케이코]] 역) 등 동료 배우들의 필사적인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타미야는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11월 15일 모든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자이젠 고로]]가 죽는 장면을 찍기 전, 타미야는 3일 동안 금식을 거쳐 암환자의 모습을 갖추고 유서도 자필로 직접 썼으며 [[더미]]나 대역 대신 타미야 자신이 자이젠의 시체 역할을 하겠다며 자청하여 하얀 시트를 뒤집어 쓰고 침대에 누워 실려가는 헌신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마지막 장면을 빛내주었다. 타미야 자신도 이 장면에 대하여 '''"잘 죽은 것 같다"''' 라며 만족스러워 했다. 하얀거탑 촬영을 마친 후 타미야는 몹시 허탈해 하며 [[프로듀서]]인 '''고바야시 슌이치'''에게 '''"[[자이젠 고로]] 이후에 나는 무슨 역할을 맡아야 할까? 도무지 모르겠다"''' 라며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타미야는 자이젠 역할에 남은 기력을 모조리 쏟아 부은 것이었다... === 사망 === [[하얀거탑]] 종영까지 불과 2화를 남긴 1978년 12월 28일 아침, 타미야의 [[장모]](즉, 후지 유키코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타미야는 매니저를 보내 장모를 병원으로 모시도록 했다. 점심시간 무렵 병원에 다녀온 매니저에게 타미야는 "배가 고프다"고 하여 매니저는 바로 [[아카사카]] 소재 단골 양식집의 [[도시락]]을 사와서 침실의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갔고, '''타미야는 침대 위에 미국제 [[산탄총]]을 가슴에 맞고 [[죽음|숨진]] 채로 누워 있었다.''' 매니저는 곧바로 경찰과 후지 유키코에게 연락을 취했고, 이후 경찰 조사를 거쳐 타미야의 죽음은 [[자살]]인 것으로 결론났다. [[향년]] '''43세'''였다. 타미야의 시신[* 한때 하얀거탑 마지막 장면에 나온 [[자이젠 고로]]의 시신은 '''자살한 타미야의 시체이다''' 라는 헛소문이 있었지만, 위에도 언급했듯 자이젠의 죽음을 촬영한 시점은 타미야가 죽기 한달 반 전이라 시간적으로 전혀 말이 안된다. 아마 타미야가 직접 자이젠의 시신 연기를 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은 [[부검]] 후 비밀리에 장례를 치루었고 1979년 1월 12일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타미야의 죽음이 알려진 이후 하얀거탑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지면서 1979년 1월 6일 방영된 최종화는 '''31.4%'''라는 굉장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 여담 == [[파일:fuji_yukiko.jpg]] 타미야 지로와 영화에 출연한 후지 유키코(좌측) * 타미야의 아내 '''후지 유키코'''(1942~ )는 [[쇼치쿠]]를 거쳐 다이에이의 간판 여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1965년 5월 타미야와 결혼하면서 영화계에서 은퇴하고 육아와 가사에만 전념하다 상기 언급과 같이 남편이 설립한 타미야 기획 대표로 일했다. 남편이 죽은 이후, 후지는 자택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외국인 전용 임대주택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뇌출혈]]로 투병한 바 있다. [[파일:시바타코타로_타미야고로.jpg]] 좌측부터 시바타 코타로, 타미야 고로 * 슬하의 아들 두 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우로 활동하였다. 장남 '''시바타 코타로'''(柴田 光太郎, 1966~ )는 배우로 데뷔했지만 현재는 고등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방송활동은 완전히 접지 않은 채 종종 이어가고 있다. 차남인 '''타미야 고로'''(田宮 五郎, 1967~2014)[* 본명은 '''시바타 히데아키'''(柴田 英晃) 이다.] 또한 배우와 예능인으로 활동했으나 2012년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져 투병 끝에 회복하지 못하고 2014년 11월 [[죽음|아버지의 곁으로 가고 말았다]]... * 2017년 타미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방송에 장남 코타로가 출연하여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 직접 제작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엉뚱한 사업에 손을 대는 바람에 엄청난 빚을 진 것도 모자라 친한 대학 선배에게 거액의 사기까지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대 인기 여배우와의 불륜설까지 퍼져 타미야를 힘들게 했다.]를 털어놓았고, 그럼에도 시바타는 타미야에 대하여 '''"지방이나 해외로 촬영을 갈 때마다 어머니와 나, 동생에게 한 통씩 총 3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만큼 가족들을 사랑한 좋은 아버지였다. 내가 그 때 나이가 좀 있었다면 아버지의 고민을 공유하고 위로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라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 시바타 코타로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으로,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친구들과 [[스키]]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별로 좋지 못한 성적표를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안절부절 했지만, 뜻밖에도 아버지는 실망하거나 크게 꾸짖지 않고 오히려 시바타를 스키 용품점으로 데려가 스키화를 사주고 온 가족과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였고, 며칠 뒤 [[나가노]] 소재의 스키장에서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고 부랴부랴 귀가한 시바타는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 하여 자신의 방에서 밤새 통곡했으며, 그 [[트라우마]]로 이후 10년 동안 스키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 2007년 [[MBC]] 드라마 [[하얀거탑(2007년 드라마)|하얀거탑]]의 [[장준혁]] 역을 맡았던 [[김명민]]은 드라마가 끝난 후 [[생방송 오늘아침]]에 출연하여 '''"우울한 역할을 맡으면 그게 전염병처럼 번진다. 일본에서 장준혁(자이젠 고로)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자살했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랬는지 알 것 같더라. 나도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우울증]] 비슷한 것을 느꼈다"''' 라고 고백한 바 있다. [youtube(znTwLua8360)] * [[더 드리프터즈]]의 전설적인 코미디 프로그램 [[8시다! 전원집합]]([[8時だョ!全員集合]])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1977년 2월 26일 방영분). 도리후 학교에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이지만 머리는 좋은[* 위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타미야는 [[가쿠슈인|가쿠슈인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수재이기도 하다.] 전학생으로 출연하여 선생님인 [[이카리야 쵸스케]]가 타미야에게 '''퀴즈 타임쇼크''' 식으로 "[[영어]]로 25는?", "[[프랑스어]]로 25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세인트헬레나|유배된 섬]]은?", "[[마터호른|마테호른]]은 [[스위스|어디에]] [[이탈리아|있는]] 산인가?" 등등 여러가지 문제를 연달아 내서 전부 맞춘 타미야는 난데없이 퀴즈 타임쇼크 사회자 마냥 '''타~임 쇼크!!'''를 외치며 출연자와 관객들을 뒤집어 놓았고 이카리야에게 "여기서까지 타임 쇼크를 끌어들일 셈이냐!"[* [[전원집합]]은 [[TBS 테레비|TBS]], 퀴즈 타임쇼크는 [[테레비 아사히]]의 전신 '''NET테레비'''에서 방영하던 프로그램 이다. 당당하게도 경쟁사 프로그램을 광고한 셈.] 라고 [[츳코미]]를 당했다. 한술 더 떠 [[시무라 켄]]의 [[유행어]]이던 "○○는 어떠심까~?(○○はいかがっすかぁ~?)"를 가로채서 '''"타임 쇼크는 어떠심까~?"'''라고 [[익살]]까지 떨면서 연기자로서의 진중하고 근엄한 이미지를 스스로 막 무너뜨리며 시청자들을 빵 터뜨렸다... * [[사케]] '''오제키'''의 광고 모델로 약 10년간 출연했는데, 정작 타미야는 술을 잘 못해서 촬영할 때에는 물을 마셨다고 한다. 오제키의 [[로고송|CM송]]인 '''술은 오제키(酒は大関)'''를 부르기도 했다.[* [[고바야시 아세이]]가 작사, 작곡했으며, 원곡은 가수 겸 배우 '''카토 토키코(加藤登紀子)'''가 불렀다.] [youtube(y7UwE5k05ck)] * [[가라테]] 초단의 유단자였으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취미는 [[마작]]과 클레이 사격이었는데, 타미야가 자살할 때 쓴 산탄총이 바로 클레이 사격을 할 때 애용하던 총이었다. [[분류:일본 남배우]][[분류:일본의 자살한 인물]][[분류:자살한 배우]][[분류:총기에 죽은 인물]][[분류:1935년 출생]][[분류:1957년 데뷔]][[분류:1978년 사망]][[분류:키타구(오사카) 출신 인물]][[분류:가쿠슈인대학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