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탈해 이사금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신라 대보)] ---- [include(틀:신라의 부마)] ---- [include(틀:한국신화의 신들)]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537B, #006494 20%, #006494 80%, #01537B); color: #fbe673" '''신라 초대 대보'''}}}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4대 국왕[br]{{{+1 탈해 이사금 | 脫解 尼師今}}}'''}}}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주 탈해왕릉.jpg|width=100%]]}}} || ||<-2> {{{#fbe673 {{{-2 탈해왕릉 전경.}}} }}} || ||<|2> '''출생[br]{{{-3 (음력)}}}''' ||[[기원전 19년]][* 단 즉위 기사에서는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있으므로, 이걸 역산하면 [[기원전 5년]]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2 또는}}} [[기원전 5년]][* 기원전 19년은 전승상 석탈해가 신라에 닿은 해이고, 기원전 5년은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조- 즉위전기에 기록된 연령으로부터 역산한 것이다.] || ||다파나국(多婆那國) {{{-2 혹은}}} 용성국(龍城國)[br]{{{-2 또는}}}[br]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br](現 [[경상북도]] [[경주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560|석탈해왕탄강유허]]) || ||<|2> '''사망[br]{{{-3 (음력)}}}''' ||[[80년]] [[8월]] (향년 85~99세) || ||[[사로국|계림국]] [[서라벌]][br](現 [[경상북도]] [[경주시]]) || || '''능묘''' ||[[탈해왕릉]](脫解王陵) || ||<|2> '''재임 기간[br]{{{-3 (음력)}}}''' ||'''{{{#fbe673 신라 초대 대보}}}'''[* 탈해 이전의 대보는 알려진 바가 없다. [[호공(신라)|호공]]이 대보가 된 것은 탈해의 이사금 즉위 이후이다.] || ||[[10년]] [[7월]] ~ [[57년]] [[11월]] {{{-3 (추정)}}} {{{-2 (47년)}}} || ||<|2> '''재위 기간[br]{{{-3 (음력)}}}''' ||'''{{{#fbe673 신라 제4대 국왕}}}''' || ||[[57년]] [[11월]] ~ [[80년]] [[8월]] {{{-2 (22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경주 석씨]] || || '''휘''' ||탈해(脫解) / 토해(吐解) || || '''부모''' ||부왕 함달파왕[br]모후 적녀국 왕녀[* 《[[삼국유사]]》 기록. 《[[삼국사기]]》에서는 '적'(積)이 빠져있다.] || || '''양부모''' ||양모 아진의선 || || '''왕후''' ||[[아효부인]] || || '''자녀''' ||왕자 석구추[br]양자 및 태자 [[김알지]] || || '''신체''' ||키 223cm, 머리 둘레 74cm || || '''묘호''' ||'''[[태조]](太祖)'''(?)[* [[성한왕|태조 성한왕]]과 탈해 이사금이 동일인이라 보는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5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gsk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gskh_005_0010_0080_0020&position=-1#gskh_005_0010_0080_0020_0001_comment|학설]]이 존재한다.] || || '''왕호''' ||'''탈해 이사금(脫解 尼師今)''' || ||<|3> '''별호''' ||토해 이사금(吐解 尼師今) || ||탈해 치질금(脫解 齒叱今) || ||탈해 이질금(脫解 尼叱今) || || '''칭호''' ||동악신(東岳神) / [[http://db.history.go.kr/id/sy_001r_0010_0020|동악대왕(東岳大王)]] || || '''직위''' ||[[대보]](大輔) ||}}}}}}}}} || >“나는 ([[금관국]])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 >《[[삼국유사]]》에서 탈해 이사금이 [[수로왕]]에게 왕위를 내놓으라고 한 말. [목차] [clearfix] == 개요 == [[경주 석씨]]의 시조 중의 한 명이자 [[신라]] 석씨 [[왕조]]의 첫 번째 임금. 칭호는 [[이사금]]. [[석탈해]](昔脫解) 또는 이름을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성의 유래는 그가 처음 신라에 올 때 실려있던 [[선박]] 위에 [[까치]](鵲)가 많이 있어 이에 까치라는 [[글자]]에서 '새 조'(鳥) 자 부분을 빼고 '석'(昔)만 남은 것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름의 이표기가 많은 것은 당대에는 한자어 이름이 쓰인 게 아니라 [[음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탈해 이사금/생애|생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탈해 이사금/생애)]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65&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一月 탈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호공을 대보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토함산에 오르다 三年夏五月 [[왜국]]과 우호를 맺다 三年夏六月 살별이 천선에 나타나다 五年秋八月 [[마한]]의 장군 맹소가 항복하다 七年冬十月 [[다루왕|백제 왕]]의 회동 요청을 거부하다 八年秋八月 백제가 와산성을 공격하다 八年冬十月 백제의 구양성 공격을 물리치다 八年冬十二月 [[지진]]이 일어나고 눈이 오지 않다 '''九年春三月 알지가 태어나고 [[국호]]를 [[계림]]으로 고치다''' 十年 백제에게 와산성을 빼앗겼다가 회복하다 十一年春一月 [[박씨]] 귀척을 주주·군주로 삼다 十一年春二月 [[순정]]을 [[이벌찬]]으로 삼다 十四年 백제가 침입하다 十七年 왜인의 침공을 막다가 우오가 전사하다 十八年秋八月 백제의 침공을 막다 十九年秋九月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다 十九年冬十月 백제가 와산성을 함락시키다 二十年秋九月 백제에게 빼앗겼던 와산성을 회복하다 二十一年秋八月 [[황산진구 전투|아찬 길문이 가야와 싸워 이기다]][* 77년 8월] 二十三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四年夏四月 강한 바람이 불어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二十四年秋八月 왕이 죽다 == 기타 == * 대개 하늘의 목소리라고 기록된 것이 대개 거론하기 힘든 특정 집단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신격화는 석탈해를 숭상하는 집단의 압력에 의해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도 신통력을 부렸다든가 하는 이야기도 있는 등 각종 이야기가 많다. [[http://www.seelotus.com/gojeon/gojeon/seol-hwa/seok-tal-hae.htm|석탈해 신화]] ~~[[실질객관동화|모 웹툰]]에 따르면 역사상 최초로 포장되어 나온 왕이다(...)~~ * [[문무왕]](제30대) 치세에 다시 뜬금없이 등장하는데, 문무왕의 꿈에 탈해 이사금이 나타나 "내 뼈를 파내서 조각상을 만들어서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문무왕이 이 명을 따라 탈해 이사금의 뼈를 파내 새로 수습했는데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1r_0020_0220_0050&position=-1|머리 둘레가 3척 2촌(74cm), 키가 9척 7촌(223cm)]][* 《삼국사기》에서는 탈해 이사금의 키가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01r_0050_0010&position=-1|9척]](207cm)이라고 나왔다.]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였던 뼈에 흙을 붙여 조각상을 만들고 그것을 토함산에 지은 탈해신전에 모셨다고 한다. 위 일화와 연관돼 서라벌(금성)이 동경으로 바뀐 고려시대엔 석탈해는 ’동악신‘ 혹 ’동악대왕‘으로 신격화됐다. 동악은 ’(동경의) 동쪽 뫼‘란 뜻으로 [[선도성모|서악대왕]]이 있던 서악 선도산과 대조한 명칭이다. 동국이상국집엔 이규보가 쓴 제문(제동서양악대왕문)이 남아있고, 삼국유사엔 위 일화가 수록돼 있다. 이규보의 제문에 따르면 동악대왕 석탈해의 [[신사(무교)]]가 토함산 꼭대기에 있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석탈해사‘가 토함산에 있다고 동일하게 나온다. 이런 일화는 문무왕이 진골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권력에 중심부에서 밀려나 잊혀진 세력인 석씨 세력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석씨 세력을 기용하기 위한 명분으로 탈해 이사금의 꿈 드립을 쳤을 것이라는 것. 실제로 문무왕은 즉위 초기에 [[김진주(신라)|김진주]] 등을 숙청하는 등 왕권 강화 행보를 보였는데 이 무렵 있었던 일로 추정된다. * 수많은 [[김(성씨)|김]]씨의 선조가 되는 [[김알지]](金閼智)는 제4대 탈해 이사금 시기에 신라에 왔다. 탈해는 김알지를 발견한 곳을 '계림'이라 부르고, 국호도 같은 것으로 했다. 더구나 김알지를 양자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신라를 지키면서도 외부 세력을 포용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니면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김알지의 세력이 막강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묘하게 석탈해의 행적과 비슷하다. ~~왕이 못된 거만 빼고...~~ * '''신라에 [[스키타이]]와 [[흉노]] 등의 유라시아 유목민들로부터 도입된 철기 문화를 가져온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야장이라는 말을 보아도 제철 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다만 이를 과대해석해 [[흉노족 신라왕족설|무리하게 신라 왕실이 흉노, 스키타이 계통이라고 확신]]하긴 힘들다.[[흉노족 신라왕족설]] 문서를 보면 나오듯이 스키타이는 커녕 흉노족과의 연결도 불안정한 가설 취급이니 말이다. == 탈해 이사금 대의 인물 == * 길문 * 김순정 * 석구추 * [[김알지]] * 김지진 * [[거도]] * 우오 * [[호공(신라)|호공]] == 대중매체에서 == [[파일:김수로 석탈해.png]] * 2010년 [[MBC]] 드라마 <[[김수로(드라마)|김수로]]>에서는 배우 [[이필모]]가 연기했다.[* 아역은 신동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어느 정도 반영했는지 초반 아역 때 회상 씬에서는 바닷가에 둥둥 떠 있는 함 안에 아기를 아진의선이 거두는데 이 아기가 바로 탈해이다.[* 탈해의 출신지가 불분명한 것도 착안했는지 작중에서는 '개구멍받이'라고 취급당하며 본인 스스로도 한탄스러울 때는 혼잣말로 부모 없는 자식이라 푸념한다.] 주운 자식이지만 아진의선은 탈해를 친아들처럼 키웠으며 마찬가지로 탈해 역시 아진의선에 대한 마음은 친엄마 못지않았다. 어릴 때는 그래도 영특하게 일 처리를 하여 아진의선에게 자식된 도리로 효도를 다했지만 본인도 야망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야철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몰래 야철장을 들어가다가 걸려서 큰일날 뻔도 했었다. 성인이 될 때는 신귀간 아래서 맡은 바 여러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어린 [[수로왕|수로]]하고도 친하게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일들로 수로와 사이가 틀어지고 나중에는 본인도 [[흑화]]됐는지 신귀간에게 있다가 정견비한테 가고 최종적으로 [[사로국]]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런 와중에 토착 세력한테도 핍박을 받지만 그들을 다 몰아내고 [[차차웅]]의 신임을 받는다.[* 사로국에서 급벌찬을 제수한 후에는 신귀간한테 하대한다. 과거 상전이었던 신귀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데꿀멍]].] 이후 [[금관국|구야국]]에 [[외교]]적인 일이 있는 와중에도 아진의선 집에 2번이나 들렀는데 아진의선과 같이 사로국에 가자고 정중하게 권유하나 모두 거절당한다.[* 비록 양모이고 항상 속 썩이는 탈해지만 금의환향하여 구야국에 있는 아진의선을 만날 때에 모자 상봉은 반가우면서 왠지 모르게 짠하다.] 이후 사로국에 계속 지내며 최종적으로 수로와의 [[전쟁]]으로 끝을 낸다.[* 실제로도 수로와 탈해의 대립은 정사 기록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작중에서 포지션은 [[주인공]]과 또다른 [[라이벌]] 구도이며 성격만 보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적이라도 편을 먹는 그야말로 [[박쥐]]와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신의 출신도 모르고 부모도 없는 주운 자식이라는 [[콤플렉스]]가 자리 잡아 어찌 보면 측은해 보이며 양모이지만 친어미인 아진의선에 대해서는 탈해에게 몇 안 되는 각별한 존재이다. [[파일:external/file1.tp.co.kr/1359932808510eed884a2f2.jpg|width=600]] * [[스퀘어에닉스]]가 개발하고 [[액토즈소프트]]가 한국 퍼블리싱을 맡은 [[모바일 게임]]인 <[[확산성 밀리언 아서]]>에 특이형 석탈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다. SR 등급으로 강적 토벌 대상. 까치깃처럼 생긴 귀에 까치 날개가 돋아있고 까치 2마리와 함께 전깃줄에 앉아있는 까치 모에화 미소년으로 묘사되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Asino. == 둘러보기 == [include(틀:탈해 이사금)] ---- [include(틀:신라 왕실)] [각주] [[분류:탈해 이사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