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76년/사건사고]][[분류:태국의 사건 사고]][[분류:학살 사건]]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clearfix] == 개요 == [[1976년]] [[10월 6일]]에 [[태국]]의 탐마삿 대학교에서 군부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군인들과 우익단체가 [[폭동적 시위진압]]한 사건. 쉽게 말해 '''동남아시아판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전두환|새로운 군부 독재자]]의 부활에 반발하여 학생 중심으로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는 것, [[위르겐 힌츠페터|베트남 전쟁을 취재한 기자]]마저 경악할 정도로 진압이 잔혹했다는 것, 희생자들이 장기간 동안 폭도라는 누명을 썼다는 것이 비슷하다.] 태국에서는 '''10.6 사건(เหตุการณ์ 6 ตุลา)'''으로 불린다. == 전개 == >'''내가 본 것 중 최악의 총격전이었다.''' >---- >[[베트남 전쟁]]을 취재한 서방 언론인의 증언 [[https://content.time.com/time/subscriber/article/0,33009,946713-2,00.html|출처]] [[1973년]] [[10월 14일]]에 [[혁명]][* 이 사건도 군대의 발포로 77명이 죽고 857명이 다쳤다.]으로 군부 세력이 물러나고 민주화된 태국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1976년]]에 [[푸미폰 야둔야뎃]] 국왕은 다시 군부 인사들과 연계를 취했고 1973년에 축출된 군부 [[독재자]] 타놈 끼티까촌(ถนอม กิตติขจร, 1911~2004)의 귀환을 격려했다. 이에 반발한 [[방콕]]의 탐마삿 대학교에서 진보 내지 [[좌파]] 학생들은 [[1976년]] 10월 4일에 나콤 파톰(Nakhom Pathom)에서 모의 [[교수형]]을 특징으로 한 정치적 연극을 수행했는데 당시 연극을 현장에서 본 사람들은 이 연극을 '모욕적'으로 보지 않았지만 바로 다음날에 태국의 우익 언론들이 이 공연 사진을 왜곡해 마치 학생들이 와치랄롱꼰 왕세자[* 이후 [[라마 10세]]로 등극했으며 2016년부터 태국의 국왕이다.]를 모의 교수형에 처한 것처럼 왜곡하여 이 연극을 '군주제를 전복하고 태국 국가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적 시도'로 보이게 했다. 이에 자극받은 우익 단체들은 바로 다음날 밤에 이 연극을 주도한 학생들에 린치를 가했다. 1976년 10월 6일 새벽 5시 반 방콕 경찰서장 스리숙 마힌또른뗍(ศรีสุข มหินทรเทพ, 1917~1993)의 발포 명령을 하달받은 태국왕립경찰(ตำรวจแห่งชาติ)과 우익 성향 [[민병대]]인 빌리지 스카우트(Village Scouts, ลูกเสือชาวบ้าน) 단원들은 덤프트럭으로 대학교 정문을 부순 후 공수부대와 국경 순찰대의 협조를 받아 무지비한 진압을 시작했다. 진압측은 비무장 시위대를 몽둥이와 발길질로 폭행하고 [[M16 소총]]과 기관총, 무반동 소총, 유탄발사기 등을 발포한 것은 기본에 [[M79]] 수류탄을 던지거나 학교 캠퍼스에 박격포나 대전차포로 포격하기도 했으며 남녀 학생 1천여명을 속옷만 입힌 채 [[기합]]을 주고 그 과정에서 발길질을 가했다. 그리고 진압측은 시위대를 나무에 매달아 [[린치]]를 가해 죽이고 시체를 잔혹하게 훼손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여학생들을 [[강간]]하거나 사람에게 휘발유를 붓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진 물품들은 진압측에게 약탈되었으며 애꿎은 민간인들이 진압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침에 일어난 이 학살은 오전 11시 반에야 종결되었다. 이렇게 단 반나절 동안 현장에서 공식 수치로만 45명(진압측 5명 포함)이 사망했고[* 다만 당시 시신을 처리한 사람들은 사망자 수가 100명이 넘는다고 밝혔으며 심지어 일각에서는 500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16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094명이 구금되었다. 그리고 구금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경찰에게 구타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1명이 옥사하기도 했다. 다만 수감된 이들은 중대한 혐의가 적용된 18명을 제외하면 1주일 뒤 모두 석방되었고 이 18명도 국제적인 압력에 2년 만에 전부 사면되었다. == 학살 이후 == 게다가 시위를 진압한 바로 당일 오후 6시에 군부가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극우]] [[반공주의|반공]] 인사인 타닌 끄라이위치안(ธานินทร์ กรัยวิเชียร, 1927~)를 총리에 앉히고 '국왕모독죄'인 형법 112조를 신설하고 정치 활동과 5인 이상의 모든 모임을 금지하면서 태국의 짧은 민주화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실제로 쿠데타 직후부터 [[1977년]] 6월까지 정치적 이유로 체포된 사람만 '''최소''' 8천 명에 달한다.] 그리고 이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처벌은커녕 오히려 '국가, 종교, 왕의 수호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반대로 피해자들은 언론을 통해 '반란군', '잘못 이끌어진 사람들', '폭도', '공산주의자' 등의 모욕을 당했으며 심지어 군부 세력들은 [[1978년]] 9월 16일에 제정된 사면법에 따라 사면받았다. 다만 1987년 기준으로 여론은 학생들을 더 동정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덤으로 탐마삿 학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당시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고 심지어 [[2019년]]에 프라차타이(Prachatai) 신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태국의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 23권 중 17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한편 [[AP통신]] 소속의 미국인 사진작가 닐 울레비치(Neal Ulevich, 1946~)는 이 날의 참상을 촬영한 사진으로 1977년에 [[퓰리처상]]을 수여받았고 [[1999년]]에 이 사진은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뉴스 사진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폭동적 시위진압, version=375, paragraph=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