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건국훈장 대통령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탕지야오}}}[br]唐繼堯[*간체 唐继尧] | Tang Jiyao'''}}}}}} || ||<-2> '''{{{#white 중화민국 호법정부 원수[br]검천전악예 5성 연군 총사령관[br]운남성장}}}'''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당계요.jpg|width=100%]]}}} || ||<|2> {{{#ffffff '''출생'''}}} ||[[1883년]] [[8월 14일]] || ||[[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8]] [[청나라]] [[운남성]] 회택현 || ||<|2> {{{#ffffff '''사망'''}}} ||[[1927년]] [[5월 23일]] (향년 43세) ||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width=28]] [[중화민국]] [[운남성]] [[곤명]] || || {{{#ffffff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width=28]] → [[중화민국/북양정부|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width=28]] || || '''{{{#ffffff 별칭}}}''' ||'''호(號):''' 동대륙주인(東大陸主人)[br]'''자(字):''' 명갱(蓂賡) || || {{{#ffffff '''직업'''}}} ||[[군인]], [[정치가]] || || '''{{{#ffffff 원수 임기}}}''' ||[[1917년]] [[9월 2일]] ~ [[1918년]] [[5월 4일]] || || {{{#ffffff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 || {{{#ffffff '''한국식 독음'''}}} ||[[당계요]]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화민국]]의 군벌. [[전계군벌]]이라 불리는 운남성의 지역군벌로, 한때 대서남주의를 주장하며 중화민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후반부에 허무하게 몰락하고 사망한다. == 생애 == === 초기 이력 === 1883년 [[윈난성|운남성]] 회택(會澤)에서 태어났다. 1903년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수재]]가 되었고 1904년 일본 도쿄의 진무학교에 유학하여 1906년 졸업했다.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이때 동기가 [[상계군벌]] [[청첸]]이다.] 1908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귀국 후 운남강무당(講武堂) 교관, 신군 진참모관(鎭參謨官) 등을 역임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운남에서 [[차이어]]의 쿤밍 중구 봉기에 참여했고 운귀총독 [[리징시]]를 몰아내고 차이어의 부하가 되었다. 1912년 귀양을 점령하여 귀주도독에 올랐고 1913년 운남도독 겸 민정장관, 1914년 개무장군 겸 운남 순안사가 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한 이후 [[리춘]], [[옌시산]]과 함께 1등 후작에 봉해졌지만 이를 거부하고 12월 23일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제제 취소와 제제를 부추긴 인물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가 대답하지 않자 12월 25일 호국군을 일으켜 도독 겸 제3군 총사령관에 취임, 위안스카이에 맞서는 [[호국전쟁]]을 벌였다. 각 성이 호응하면서 1916년 군무원이 설립되자 국무총리 격인 무군장에 추대되었다. 1916년 3월 23일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1916년 11월 [[차이어]]가 사망하자 사천성을 차지하기 위해 나패금을 사천도독에 임명하고 사천군벌 류존후와 싸움을 벌였다. === [[호법전쟁]] ===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 복구를 약속하자 7월 14일 군무원은 해산되었고 8월 1일 국회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국회에선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라는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돤치루이가 남방의 군벌들과 리위안훙을 제압하고 중국을 무력통일하기 위해 무리하게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주도하여 복벽파인 안휘독군 [[장쉰]]을 끌어들였다가 [[장훈복벽]]이라는 황당한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탕지야오는 장훈복벽을 토벌하겠다는 통전을 보냈다. 돤치루이에 의해 장훈복벽은 12일만에 진압되었으나 돤치루이는 구국회와 약법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독재를 일삼았고 이에 분노한 [[쑨원]]이 [[1차 호법운동]]을 벌여 광저우로 남하하게 된다. 탕지야오는 세력확장을 위해 호법운동을 이용하기로 결정, 쑨원을 환영하는 한편 돤치루이에게 구국회 회복을 요구했다. ||첫째, [[리위안훙|총통]]이 만약 복직하지 않겠다면 국회에 사직을 청해야 한다. 둘째, 국회를 회복시켜야 한다. 셋째, 국무원은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으면 무효이다. 넷째, [[장훈복벽|군사를 일으켜 항명]]한 [[장쉰|화수]]를 엄벌해야 한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서남파의 요구를 철저히 씹었고 결국 쑨원은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라 불리는 1차 광동정부를 조직, 대원수에 추대되었다. 탕지야오는 [[계계군벌]]의 수장 [[루룽팅]]과 함께 원수로 추대되었지만 취임하진 않았다. 탕지야오는 호법운동에 호응한다는 구실로 사천성에 출병했고 9월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사천성을 장악, 12월 전검천 3군회의를 통해 정국군을 일으켜 정국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슬슬 쑨원이 귀찮아진 탕지야오는 [[루룽팅]], [[천춘쉬안]]과 결탁하여 쑨원 축출을 기도했고 1918년 군정부 개조를 관철시켰다. 실망한 쑨원은 5월 21일 광저우를 떠나버렸고 1차 호법운동은 끝났다. 탕지야오는 1918년 5월 검천전정국연군 총사령관, 9월 검천전악예 5성 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후 1918년 11월 북양군벌과 휴전하고 서북 지배를 꿈꾸게 된다. 1919년 [[중국 국민당]]이 조직되자 가입을 제안받았지만 거부했으며 이후 군정부와 의회를 농단하는 루룽티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1차 광저우 군정부에 대한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1920년 6월, 쑨원의 루룽팅 토벌선언에 연명하는 등 [[2차 호법운동]]에 정부총재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하지만 1921년 쑨원의 북벌론에 호응한 부하 [[구핀전]]에게 운남성에서 축출당했다. 그러나 근성있게 1922년 고품진을 암살한 후 권좌에 복귀, 운남성장에 취임하여 운남의 지배자가 되었다. === 몰락과 말년 === 1924년 운남군을 건국군으로 개편하고 7성 건국연군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하자 3월 18일에 난데없이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자신을 국민당 대본영 부원수로 자칭하고 연성자치를 주장하였다. 이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탕지야오 토벌을 선언하였다. 탕지야오는 [[양시민]], 유전환 등 국민당 산하의 군벌들과 결탁하고 천중밍과 연계하여 국민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나 양시민과 유전환은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듣지 않고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고 천중밍도 [[국민당의 1차 동정]]에 이은 [[국민당의 2차 동정]]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탕지야오는 이에 직접 광저우 [[국민정부]]를 공격했지만 1924년에 국민당에 가입한 광서군벌 [[리쭝런]]과 [[바이충시]]의 공격으로 패배했다. 1925년 [[천중밍]]과 결탁하여 [[중국치공당|치공당]]을 조직하고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대항하여 반공, 토적을 주장하며 [[우페이푸]]와의 동맹을 시도했지만 1927년 2월 6일, 휘하의 [[룽윈]], 서진수(四鎭守) 등이 정변을 일으켜 치공당을 해체하고 탕지야오를 실각시켰다. 탕지야오는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운남성정무위원회 총재로 좌천되었다가 몇달 만인 5월에 사망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 == 탕지야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특히 [[신규식]]과의 사이가 매우 각별했다고 한다.] 교류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한국인민(韓國人民)은 망국지민(亡國之民)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한국을 위하여 최소한도 2개 사단의 군관 인재를 양성하고 귀국 혁명을 원조할 것을 맹서”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약 30명의 한인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5년에도 육군강무당 제19기생과 신규 비행대에 한인이 입학 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힘쓰기도 했다.[* 이때 비행사가 된 인물이 그 유명한 [[권기옥]].] 육군강무당은 탕지야오가 1909년 쿤밍(昆明)에 설립한 군사학교였다. 탕지야오는 운남강무당에 한국임시정부가 증명한 신분증을 지참한 학생들은 모두 수용해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해 주면서 50명을 졸업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탕지야오는 일찍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근대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일본과 한국 모두에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육군강무당은 중국 근현대 주요 군사지도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사로 [[주더]]와 [[펑더화이]]가 있다. 한인 독립운동가들 역시 육군강무당에서 훈련을 받고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이범석]]을 비롯하여 [[이준식(군인)|이준식]]·[[김관오]] 등이 모두 육군강무당 출신이었다. 일본 관헌은 탕지야오의 한국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고, 한국인 학생들이 강무학교에 수학할 수 없도록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탕지야오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우의를 저버리지 않고 한인 청년들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68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서문당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권.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7407&cid=40942&categoryId=33399|두산백과 탕지야오 문서]] * [[https://en.wikipedia.org/wiki/Tang_Jiyao|영문 위키백과 탕지야오 문서]] == 관련문서 ==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2차 호법운동]] * [[1차 직봉전쟁]] * [[영풍함 사건]] * [[회선 사건]][* 정말 뜬금없게도 3위 후보였다.] * [[2차 직봉전쟁]]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분류:청나라의 군인]][[분류:전계군벌]][[분류:호법정부 정무총재]][[분류:1883년 출생]][[분류:1927년 사망]][[분류:쿤밍시 출신 인물]][[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분류:한국의 외국인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