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로마의 섭정]][[분류:동로마 황후]][[분류:아우구스타(동로마)]][[분류:아르메니아계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아우구스타)] [[파일:2331.jpg|width=350]] 테오도라를 그린 19세기의 [[이콘]] || 지위 || 기간 || ||[[테오필로스]]의 황후 ||830년 6월~842년 1월 || ||[[미하일 3세]]의 섭정 ||842년 1월~856년 3월 || [목차] == 개요 == 9세기 [[동로마 제국]] [[아모리아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의 황후. [[아르메니아]]계라서 동명이인들과의 구별을 위해 '아르메니아인 테오도라(Theodora the Armenian)'라고 불린다. 대단한 미녀였다고 하며, [[테오필로스]]가 10대의 나이로 단독 황제가 되자 그의 계모 [[에우프로시나]]는 830년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오필로스의 신부 간택을 위해 전국에서 후보를 불러모았고, 여기서 테오도라가 황후로 간택되었다. 테오도라는 황후로 지내며 [[테오필로스]]와의 사이에서 [[미하일 3세]] 등 7남매를 낳았다. 842년, 테오필로스는 신하 및 관리들에게 아내 테오도라와 아들 미하일 3세의 권리를 지켜달라 말하고선 죽었고, 테오도라는 어린 아들 미하일 3세의 섭정이 되었다. 남편 [[테오필로스]]는 물론 세계총대주교까지 성상 파괴주의자였음에도 테오도라는 섭정이 되자 정치력을 발휘하여 843년에 성상 파괴령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성상 파괴파인 [[바오로파|파울리키아파]]를 박해하게 되었고, 박해를 피해 도망친 이들이 동방의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동부 전선의 긴장이 높아지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아들 미하일 3세가 성년이 되자 며느리감을 짝지어 주었으나 미하일 3세는 어머니가 고른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를 맘에 안 들어했으며[* [[미하일 3세]]는 [[에우도키아 잉게리나]]를 정부(情婦)로 두었는데, 그녀는 훗날 [[바실리오스 1세]]의 황후가 되었다.] 점차 어머니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였다. 결국 미하일 3세는 손위 외삼촌[* 즉 테오도라의 오빠다.] [[바르다스]]와 손잡고 일종의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테오도라를 실각시켰다. 856년 3월, 미하일 3세는 자신을 단독 황제로 선포하고 모친 테오도라의 [[아우구스타]] 지위를 박탈했다. 테오도라의 사후 그녀의 유해는 [[코르푸]]에 안치되었는데, [[4차 십자군]]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내의 영묘들이 모두 파괴돼 버려 시신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소수의 황제 및 황후 중 한 명이 되었다. == 여제 설 == 현대 역사가들은 테오도라를 단순한 [[섭정]] 황태후가 아니라 [[여제]]로 보기도 한다. 테오도라의 통치 첫해에 발행된 동전의 앞면에는 테오도라만 단독으로 새겨지고 미하일 3세는 뒷면에 [[테클라(테오필로스)|테클라]]와 같이 그려진 점, 테오도라의 통치 초기에 나온 황제의 옥새에 테오도라, [[미하일 3세]], [[테클라(테오필로스)|테클라]] 셋 다 '황제'라는 남성형 칭호로 칭해진 점 등이 증거로 제시된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테오도라가 최고 황제였고, [[미하일 3세]]와 [[테클라(테오필로스)|테클라]]는 로마에서 후계자에게 주던 명목상 공동황제였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