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모레아 군주)] || '''이름'''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br](영어: Theodore II Palaiologos, 그리스어: Θεόδωρος Β΄ Παλαιολόγος)|| || '''출생''' ||[[1396년]]경|| || '''사망''' ||[[1448년]] [[6월 21일]]|| || '''직위'''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목차] [clearfix] == 개요 == [[모레아 전제군주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2대 [[데스포티스]]. == 생애 == [[1396년]]경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와 [[엘레니 드라가시]] 황후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요안니스 8세]],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가 있었다. 10살에 막 접어들었을 때 부친으로부터 [[데스포티스]] 칭호를 수여받았고, 1407년 6월 24일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가 사망한 뒤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 이후 마누일 2세는 모레아에 머물면서 파트라를 공략하려 시도했지만 베네치아에게 저지되었으며,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헥사밀리온 성벽을 건설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중재로 페사로 백작의 딸인 클레오파 말라테스타(Cleopa Malatesta)와 결혼했으며, [[마누일 2세]]가 [[1425년]] 7월 21일에 사망한 직후 교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로 불렸다. 그러나 황위는 마누일 2세의 또다른 아들인 [[요안니스 8세]]에게 넘어갔다. 이로 인해 양측간 대립이 벌어지던 중,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카를로 1세 토코]]가 모레아를 압박했다. 테오도로스는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고, 황제는 처음엔 방관했지만 [[1426년]] 후반 카롤로 1세의 군대가 엘리스 평원을 습격하여 동로마 제국 소유의 [[가축]]들을 약탈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1427년]] 요안니스 8세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글렌차 요새를 포위하였고, 동로마 함대는 에키나데스 해전에서 카를로의 함대를 격파했다. 그 후 양측은 협상 끝에 요안니스 8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11세|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와 카를로의 조카인 막달레나 토코와 결혼하기로 하고, 이피로스는 글렌차 및 몇몇 영지를 지참금으로써 동로마 제국에 헌납하기로 했다. [[1428년]] [[콘스탄티노스 11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함께 모레아를 분할 통치하였으며, [[1430년]] 파트라를 공략했다. [[1438년]] 요안니스 8세가 피렌체로 떠날 때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제국의 섭정으로 선포한 것에 반발하여 연장자인 자신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왕위 계승에 대한 논쟁이 수년간 이어지다가 [[1443년]] 콘스탄티노스로부터 셀림브리아 영지를 양도받는 대가로 황위 계승을 포기했다. [[1448년]] 6월 21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사후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모레아의 새 데스포티스로 선임되었고, [[1449년]] 1월 6일 제위에 오른 뒤, 모레아는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형제에 의해 분할되었다. [[분류:모레아 군주]][[분류:팔레올로고스 가문]][[분류:1396년 출생]][[분류:144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