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황제)]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0E09, #9F0807 20%, #9F0807 80%, #8F0E09);" '''{{{#FCE774,#FCE774 로마 제국 제64-2대 황제}}}[br]{{{#FCE774,#FCE774 {{{+1 테오도시우스}}}[br]THEODOSIVS | Θεοδόσιος}}}'''}}}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olidus_of_Theodosius_(son_of_Maurice).png|width=100%]]}}} || || {{{#FCE774,#FCE774 '''이름'''}}}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 [br]Φλάβιος Θεοδόσιος Τιβέριος Αὔγουστος|| ||<|2> {{{#FCE774,#FCE774 '''출생'''}}} ||583/585년 8월 4일 || ||[[동로마 제국]] || ||<|2> {{{#FCE774,#FCE774 '''사망'''}}} ||602년 11월 27일 이후 (향년 16-19세) || ||[[동로마 제국]] [[칼케돈]] || ||<|2> {{{#FCE774,#FCE774 '''재위 기간'''}}} ||{{{#000 로마 황제}}} || ||[[590년]] [[3월 26일]] ~ [[602년]] [[11월 27일]] '''(12년)''' || || {{{#FCE774,#FCE774 '''전임자'''}}} ||[[마우리키우스]] || || {{{#FCE774,#FCE774 '''후임자'''}}} ||[[포카스]] || || {{{#FCE774,#FCE774 '''부모'''}}} ||[[아버지]] : [[마우리키우스]][br][[어머니]] : [[콘스탄티나]] || || {{{#FCE774,#FCE774 '''종교'''}}} ||[[기독교]]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의 64-2대 황제. 590년 [[마우리키우스]]에 의해 공동 황제로 선임되었지만 602년 [[포카스]]의 난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 생애 == [[마우리키우스]]와 [[콘스탄티나]]의 장남이다. 에페소스의 요한에 따르면, 그는 583년 8월 4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반면 고백자 테오파니스와 케드레노스에 따르면, 58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587년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 칭호를 받았으며, 590년 3월 26일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로 선임되었다. 597년, 마우리키우스는 장남 테오도시우스를 동방의 황제로, 차남 티베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계승시킨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그의 어린 네 아들들로 하여금 알렉산드리아, 카르타고, 안티오키아, 라벤나에서 제국을 4등분해 통치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와 흡사한 정책이다. 601년 말 또는 602년 초,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게르마누스의 딸과 결혼했다. 이 게르마누스가 [[티베리우스 2세]]로부터 카이사르에 선임되었지만 며칠 만에 마우리키우스에게 양보했던 [[게르마누스]]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사모카타의 테오필락투스는 602년 2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났을 때 테오도시우스는 살해당할 뻔했지만 게르마누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기술했다. 602년 가을 [[포카스]]가 이끄는 다뉴브 전선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거부할 뿐 황실에 대한 충성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면서, 테오도시우스나 게르마누스를 황제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즉각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소환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매질을 당했고 게르마누스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 지지자들을 동원하여, 자신을 잡으러 온 황궁 근위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백성들이 식량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황제를 몰아내자며 봉기하자, 마우리키우스는 아내와 여덟 명의 자식, 그의 충신인 동방의 민정 총독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와 함께 변장을 하고 황궁을 빠져나간 다음 일전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복귀한 바 있던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에게 의탁하려 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와 함께 호스로 2세를 찾아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아버지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칼케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칼케돈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와 동생들이 며칠 전인 11월 27일에 처형당한 뒤였고, 그 역시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가 체포되지 않고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603년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마우리키우스]]의 장남 테오도시우스라고 사칭한 자를 전면에 내세우며, 찬탈자를 몰아내고 은인의 아들을 복위시키기 위한 성전이니 로마인들은 적대하지 말라고 선전하며 전쟁을 단행했다. 테오도시우스를 사칭한 이는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 사브리쇼 1세의 집전하에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608년 테오도시오폴리스가 그를 영접한 뒤 사산 왕조에 항복했고, 에데사 역시 609년에 항복했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사칭자의 이후 행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제임스 하워드-존스턴은 이 테오도시우스가 가짜라는 주장은 동로마 제국의 선전일 뿐이며, 테오도시오폴리스와 에데사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사기꾼에게 모두 속았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이 인물이 진짜 테오도시우스라고 주장하지만, 다수의 학자는 이 인물이 가짜라고 본다. [[분류:동로마 황제]][[분류:폐위된 군주]][[분류:602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