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 성인명 ||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 || 축일 || [[12월 29일]] || || 성인구분 || [[성인(기독교)|성인]] || || 신분 || [[주교]], [[순교자]] || ||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 || 출생년도 || 1119년 12월 21일 혹은 1120년 초 || || 사망년도 || 1170년 12월 29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1118년 ~ 1170년)은 중세 서방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이다. == 생애 ==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 1090 ~ 1143?)와 캉[* 프랑스 서북부 바스노르망디 칼바도스에 있는 도시]의 마틸다(Caen of Matilda, 1090 ~ 1141)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수도회[* 머튼 프리오리 수도회와 수도원 건물은 [[런던]]에 있는 머튼구에 있었는데 [[헨리 8세]]가 수도원 철폐령으로 사라지고 현재는 [[슈퍼마켓]]이 그 터를 차지하고 있다.]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벡 테오발드 대주교(Theobald of Bec, 1090 ~ 1161)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가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 현재의 부르고뉴 욘주의 주도]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성직자)|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a)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헨리 2세]]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오브 벡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성품성사|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4년 영국에서는 성직자의 권한을 제한하는 클라레든 칙령을 통과시켰다. 성직자를 교회법이 뿐만 아니라, 세속법정에도 세울수 있게 한 법안이다.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베케트는 처음에는 마지못해 법안을 수용했다가, 대주교로서 교회를 배신하는 행위라고 생각되어 1166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 현재의 프랑스 부르고뉴 프랑 슈 콩테에 있는 작은 도시]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상스(Sens)[* 프랑스 부르고뉴 욘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베케트는 [[이단심문관|종교재판관]]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때 헨리 2세가 원하는 수준보다 온건하게 죄인들을 처벌해서 심기를 건드렸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 이게 헨리 2세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의 '[[과잉 충성]]'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케트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연을 끊고 막 나가기 시작한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행#s-2|기소(...)해버렸다.]] 그러면서 항변을 할 게 있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이미 저승 간 양반이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단심가|백골이 진토 된지라]] 재판정엔 나타나지 않았다. 이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모셔지던 [[부관참시|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영국]]의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그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정교분리]] 원칙을 깨뜨리고 '[[영국]] 왕권을 [[교황]]권에 종속시키려 했던 [[가톨릭]] 광신자'라는 악평도 늘어나게 되어, 2006년 영국 [[BBC]]에서 선정한 '''최악의 영국인''' 여론조사에서 '''2위'''로 뽑히는 등 최근에는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 매체 == [[이우혁]]의 소설, [[퇴마록]]의 등장인물 [[박신부]]가 [[엑소시즘]]을 행할 때 베케트의 십자가를 사용한다. 켄 폴릿의 장편소설인 [[대지의 기둥]]의 최후반부를 장식하는 대목이 이 살인사건이다. 당시 사회상을 잘 드러낸 소설로 강직하지만 지나치게 고지식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스포 마지막에 헨리왕의 불평을 확대해석해서 살인을 계획하고 쳐들어온 햄리 일당을 필립 수도원장이 저지하고 서둘러 도망가자고 하는데 주교성당을 떠나는 걸 거부할뿐만 아니라 일단 일과를 지키자고 이동하는것도 느릿느릿 걸어가니 초반에 묘사로 호의를 가진 독자 입장에선 답답해 미칠 노릇. 그래도 최후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숭고하게 묘사되었다.] [[분류:1170년 사망]] [[분류:가톨릭 캔터베리 대교구장]] [[분류:영국의 살해된 인물]] [[분류:가톨릭 순교자]] [[분류:영국의 가톨릭 주교]] [[분류:가톨릭 성인]] [[분류:성공회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