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800080> {{{#ffffff {{{+3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br]{{{-1 [[라틴어]]: Tiberius Claudius Nerō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조부)[br]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아버지)[br]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형제) || ||<#800080> {{{#ffffff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임기'''}}} || 기원전 202년 || ||<#800080> {{{#ffffff '''전임'''}}} ||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기원전 203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br][[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 ||<#800080> {{{#ffffff '''후임'''}}}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201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br][[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원정군 지휘권을 빼앗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 생애 == 로마 최고의 명문 귀족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의 아들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증손이다. 네로(Nero)라는 이름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뿌리인 사비니인들의 언어로 "강하고 용감하다", "활기차고 쾌활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별칭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의 막내아들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처음 받아, 코그노멘으로 애용하면서 가족 성씨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조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부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별다른 공직을 맡지 못했다. 형제로 기원전 195년 법무관을 맡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있었고, 사촌으로 기원전 207년 [[집정관]]이며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맹활약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있었다. 기원전 204년 법무관을 맡아 사르데냐에서 통치하면서 아프리카 원정을 떠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로마군에 보급물자를 전달했다. 기원전 202년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두 집정관은 [[한니발 바르카]]와의 결정적인 전투가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로 가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불후의 명성을 챙기고 싶었다. 그들은 원로원에 스키피오가 너무 많은 명성을 챙기게 내버려두면 위험하다며, 제비뽑기를 통해 자신들 중 하나에게 아프리카 방면 [[임페리움]]을 맡기라고 요청했다. 민회는 스키피오가 원정군을 계속 지휘하게 하기로 결의했지만, 원로원은 제비뽑기를 통해 새로 뽑기로 했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가 아프리카 방면을 맡게 되었다. 그는 5단 노선(Quinquereme) 50척에 군대를 태워서 아프리카에 상륙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함대가 출항하기 전, 한니발 바르카가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카르타고가 항복을 선언하기 전에 군공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출항해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거쳐 아프리카 해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에 두 번의 폭풍을 겪고 칼리아리에서 배 수리에 전념해야 했다. 스키피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임페리움을 잃기 전에 카르타고와의 평화 협약을 서둘러 체결하기로 하고 요구 조건을 비교적 온건하게 설정했다. 티베리우스는 그 해 겨울 칼리아리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돌아갔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언제 사망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폴리비오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라는 인물이 기원전 172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루스 또는 마르쿠스 데키미우스와 함께 동방으로 가서 로마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치를 때 동맹국들이 군사 원조 계약을 준수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기술했다. 이 인물이 기원전 202년 집정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며, 일부 학자들은 아들일 거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