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br]{{{-1 [[라틴어]]: Titus Manlius Torquat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조부)[br]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아버지)[br][[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형제)[br]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65년 || ||<#800080> {{{#ffffff '''전임''' }}}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br][[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기원전 166년 집정관)|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 || ||<#800080> {{{#ffffff '''동기''' }}} ||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6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 ||<#800080> {{{#ffffff '''후임''' }}} ||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br][[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164년 집정관)|퀸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만리우스 씨족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고귀한 귀족 집안으로 손꼽혔다. 기원전 480년 첫 집정관을 배출한 걸 시작으로,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집정관 13명에 [[집정 무관]] 14명을 배출했다. 토르콰투스라는 코크노멘은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가 켈트족을 물리치고 족장의 토르퀘스(Torques)[* 금속선 몇 가닥을 꼬아서 만든 장신구를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로, 켈트 전사들이 목에 차고 다녔다. 또한 켈트 신격 [[케르눈노스]]의 도상에서도 토르퀘스는 중요한 지물이다. 영어로는 토크(Torc)라고 표현한다.]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데서 비롯되었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토르콰투스를 물려줬고, 자신들이 주조한 주화에 자랑스럽게 새겼다. 조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기원전 231년 [[감찰관]], 기원전 224년 집정관, 기원전 208년 [[독재관]]을 역임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15년 [[사르데냐]]에서 [[한니발 바르카]]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함프시코라]]를 진압했다. 아버지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는 이름만 전해지며, 형제로 [[아울루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가 있었다. 기원전 170년 루키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사망한 뒤 공석이 생긴 [[폰티펙스]]를 맡았다. 기원전 165년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165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집정관으로서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이듬해에 집정관에 선임된 형제 아울루스를 도와줬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62년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간의 권력 분쟁이 발생했을 때, [[원로원]]은 그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알렉산드리아로 파견해 둘을 중재하게 했다. 두 사람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키프로스]]를 형제 프톨레마이오스 8세에게 양도하도록 권고했다.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그리스에서 용병을 모집했지만, 킬리키아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으로부터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권고를 받자 용병대를 해산했다. 메룰라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크레타와 리비아로 향했고,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원로원의 중재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협상을 질질 끌었고,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듬해 두 프톨레마이오스 사절단이 로마에 이르렀을 때, 그와 메룰라는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지지했고,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의 동맹을 끊기로 결정했다. 이후의 행적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전하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기원전 140년경, 유니우스 실라누스 가문에 입양된 그의 아들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을 맡아서 속주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이 소송의 진상을 먼저 살펴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는 자기 저택에서 가족 재판을 실시하고 양측의 입장을 모두 들은 뒤, 자신의 아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집안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데키무스 유니우스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그는 아들의 장례식 참석마저 거부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너무 가혹한 법을 가리켜 만리우스적인 법률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