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신라 국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FBE673 '''파사 이사금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신라 태자)] ---- [include(틀:신라 왕실)]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신라 제5대 국왕[br]{{{+1 婆娑 尼師今 | 파사 이사금}}}'''}}}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gyeongjuimage.or.kr/w_%EC%98%A4%EB%A6%8903(%EC%A0%84%EA%B2%BD)_%EB%8F%84%EB%A1%9D148P.jpg|width=100%]]}}} || ||<-2> {{{#fbe673 {{{-2 사릉(蛇陵) 전경.}}} }}} || ||<|2> '''출생[br]{{{-3 (음력)}}}''' ||[[45년]] 이후(?) || ||[[사로국]] [[서라벌]] || ||<|2> '''사망[br]{{{-3 (음력)}}}''' ||[[112년]] [[10월]] (향년 60~70대)[* 다만 추측할 뿐이다. 형인 [[일성 이사금]]의 생년이 불분명하므로 이도 추측이다.] || ||[[사로국]] [[서라벌]] || || '''능묘''' ||[[오릉|사릉]](蛇陵) || ||<|4> '''재위기간[br]{{{-3 (음력)}}}''' ||'''{{{#fbe673 신라의 태자}}}'''[*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1r_0020_0230_0010&position=-1|《삼국유사》]]에서 [[김알지]]로부터 태자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연대 미상 ~ [[80년]] [[9월]] || ||'''{{{#fbe673 제5대 이사금}}}''' || ||[[80년]] [[9월]] ~ [[112년]] [[10월]] {{{-2 (33년)}}}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밀양 박씨]] || || '''휘''' ||파사(婆娑) / 지고(知古)(?)[* 《[[일본서기]]》에서만 등장. [[천일창]]의 동생으로써 국왕에 올랐다고 하며, 초창기 박씨 왕실에서 차남으로서 즉위한 사람은 파사 이사금 밖에 없다.] || || '''부모''' ||부왕 [[유리 이사금]][br]모후 사요왕의 딸 || || '''형제자매''' ||이복 형 [[일성 이사금]] || || '''왕후''' ||사성부인 김씨 || || '''태자''' ||박하원, [[지마 이사금|박지마]] || || '''왕호''' ||'''파사 이사금(婆娑 尼師今)''' ||}}}}}}}}} || [목차] [clearfix] == 개요 == [[신라]]의 제5대 [[국왕]]. 칭호는 [[이사금]]. '''아직 [[진한]]의 일개 [[소국]]에 불과했던 초기 신라를 진한의 [[맹주]]급으로 끌어올린 [[정복군주]]이다'''. 기록상 파사 이사금 시대에 신라가 본격적으로 [[경주시|경주]] 바깥 영토를 획득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실질적인 고대 국가 신라의 시초를 파사 이사금 재위기로 보기도 한다. 파사 이사금의 '파사'(婆娑)는 [[불교]]적인 이름으로, [[범어]](산스크리트어)에서 '유제'(bhasa, 有諦, 진리가 모습을 드러냄)를 뜻하는 단어이다. 《[[삼국유사]]》 <탑상>에 나오는 -[[http://db.history.go.kr/id/sy_003r_0020_0030_0010|금관성파사석탑]]- 설화도 이와 똑같은 한자를 쓴다. 단 아직 신라에 불교가 도입되기 한참 이전이기 때문에 [[음차]]일 뿐 한자 의미는 나중에 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측 기록에 한자가 다른 '파사'(波沙)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음차인데, 한자의 뜻보다는 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단 이 《일본서기》의 '파사 매금'은 초기 신라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본 역사가가 [[실성 마립간]](제18대)과 혼동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실성 마립간 문서의 해당 단락 참조.] 불교적이지 않은 뜻으로는 춤추는 소매가 나부끼는 모양, 즉 현대 국어의 '''바스락'''에 해당하는 뜻이 있다. == 생애 == 《[[삼국사기]]》에서는 제3대 [[유리 이사금]]의 둘째 아들 혹은 《삼국사기》의 [[주석(언어)|주석]]에 유리 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는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사초부인(史肖夫人)이라고 했는데 자형이 비슷해서 둘 중 하나가 다른 쪽으로 와전된 것이 확실시된다. 앞서 유리 이사금은 유언으로 자신의 두 아들보다도 [[남해 차차웅]](제2대)의 [[사위]]이자 자신에게는 매제가 되는 [[탈해 이사금|석탈해]]가 재능이 있다고 해서 [[왕위]]는 일단 [[탈해 이사금]](제4대)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탈해는 석씨라도 일단 박씨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기 때문에[* 왕의 성씨가 바뀌는 다른 사례인 후대의 [[미추 이사금]](제13대) 김미추, [[신덕왕]](제53대) 박경휘도 일단 사위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탈해 다음은 다시 원래대로 박씨가 즉위할 차례여서 유리 이사금의 [[장남]] 일성(逸聖)이 즉위하게 되어 있었으나 《삼국사기》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위엄과 총명이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마침내 [[차남]] 파사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라고 언급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 때문에 일성과 파사가 이복형제였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유리 이사금에게 다른 왕비나 [[후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사에 일성과 파사의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의 이유로 [[역사학]]계에서는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 않는다.] '''파사와 일성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결국 일성은 먼 훗날에 제7대 국왕 [[일성 이사금]]이 되지만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일본서기]]》 등에 언급되는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일성 이사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또한 파사 이사금 부인의 성씨로 [[김씨]]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김알지]]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파사 이사금의 정치력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서기 81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낸 뒤 국내를 순행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사형]]수가 아닌 죄수들은 모두 용서해주는 대대적인 사면을 실행했다. 82년 각지의 [[관리]]들에게 [[농사]]와 양잠[* [[누에]]를 길러 [[비단]]을 생산하는 일]을 장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87년 재차 성과 보루를 수비해 백제와 가야의 침공에 대비하고,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을 새로 지었는데 이 기록은 경주 지역을 벗어난 첫 축성 기록이다. 90년 10인을 파견해 주군의 관리를 감독하게 하고, 93년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직접 행차하여 나이많은 백성을 위문하며 [[곡식]]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노동력 확충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증강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파사 이사금은 군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다. 85년 [[백제]]의 침입과 94년 [[가야]]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신라의 세력은 고대 [[국가]]라고 하기에는 모자라 84년 고타야국의 [[조공]] 기록이 남아 있는데 [[세금]]이 아니라 조공이라는 점에서 주변의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주변 국가들 중에서는 나름 강했던지 96년 가야가 침입해왔을 때는 오히려 [[역관광]]시켜 97년 화친을 받아냈다. 이후 지역 맹주로서 각국의 분쟁 해결을 주선하거나 말 안 듣는 국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김해]] [[금관국]]의 [[수로왕]]이 나온다. [[음즙벌국]](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과 [[실직국]](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났는데 두 나라는 먼저 파사 이사금에게 와서 [[중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일단 파사 이사금은 나이가 많고 지식도 많은 김해 수로왕에게 묻자고 떠넘겼다. 파사 이사금의 요청을 받은 수로왕은 [[신라]] [[서라벌]]에 방문하여, 파사 이사금이 맡은 영토 문제를 대신 지혜롭게 해결해 음즙벌국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열린 연회에서 신라 6부 중 한기부의 대접이 시원치 않았다. 신라 6부의 다른 부는 [[이찬]][* 당시 신라 최고위 관등. 파사 이사금 대에는 [[이벌찬]]이 없었다.]([[장관]]급)으로 수로왕에 대한 [[의전]]을 행했는데, 한기부는 수로왕을 하찮게 보고, 낮은 등급의 인사를 의전이랍시고 보냈기 때문이다. 이건 '''[[신라]]가 맞을 짓 한 거다'''. 파사 이사금이 [[수로왕]]한테 분쟁 해결을 떠밀고 신라로 초청했으면 외국 [[국왕]]에 걸맞는 [[의전]] 대우를 해야 했다. 쉽게 말해 옆나라 [[대통령]]이 분쟁 해결을 위해 한 나라에 방문했는데 방문한 나라에서 만찬장에 각 부 [[장관]]급이 아닌 5급 [[사무관]]을 의전이랍시고 들이밀면 회담장이 개판 나지 않겠는가?[* [[독소 불가침조약]] 때 [[모스크바]]를 방문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장관급이었는데, 소련 최고 권력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직접 맞았다. 파사 이사금 입장에서, 국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외국 국왕을 초청했으면 의전 대접은 나쁘지 않게 했어야 했다.] 한기부의 대우에 열이 받은 수로왕은 [[자객]]을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였는데 자객이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음즙벌국에 숨었고, 군주인 타추간(陀鄒干)이 자객을 보호했다. 이에 파사 이사금이 102년 음즙벌국에 침공해 타추간이 항복했고, 신라의 실력 행사에 겁을 먹은 [[삼척시]](혹은 [[울진군]], [[태백시]], [[동해시]])의 실직국과 [[경산시]]의 [[압독국]]이 잇따라 항복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작 주범인 금관국은 아직 공격하지 못하고, 화풀이나 했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신라도 금관국을 치기에는 명분이 쫄렸는데, '''먼저 수로왕을 경주로 초청한게 파사 이사금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외국 국왕이 방문한다 그러면 파사 이사금이 신하들에게 명령해서 적절한 [[의전]] 조치를 했어야 하지만 파사 이사금은 의전 대접에 실패한 책임이 있었기에 수로왕을 공격하지 못한 것이다. 이때 그냥 항복한 실직국과 압독국은 완전하게 병합된 건 아니고 그냥 신라에 종속된 명목상의 [[속국]] 정도로만 된 듯하며 싸워보지도 않고 허무하게 항복한 게 못내 아쉬웠는지 나중에 각자 신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 그러나 둘 다 참패했고 주민들은 모두 경주에 가까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멸망]]했다. 6년 뒤에는 경상북도 내륙으로 진출해 [[다벌국]]([[대구광역시]]), [[비지국]]([[창녕군]]), [[초팔국]]([[합천군]])까지 공격해 병합했다. 북으로는 [[반파국]](후의 [[반파국|대가야]]), 남으로는 [[안라국]](후의 [[안라국|아라가야]]) 등이 있는 요충지인 이 지역은 이후 신라가 가야 계열 국가들과의 본격적인 힘싸움을 위해 교두보로써 점령한 듯하다. 105년 백제와 화친하고 106년 가야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들로 [[지마 이사금]]이 있다. 《삼국사기》 <[[박제상]] 열전>에 따르면 [[아도 갈문왕]]이 파사 이사금의 3세손([[손자]])이라고 한다. == 기타 == * [[조선시대]] [[영조]] 때는 파사 이사금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U0_A05_07B_09A_00210_2018_115_XML|삼국시대 초창기 왕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2019년 치러진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파사 이사금이 언급된 보기가 2번이나 나왔다.(2019 기상직, 계리직). 두 시험에서 모두 수험생을 혼란하게 할만한 보기의 역할을 맡았다. * 신라의 초기 왕들은 [[역사]] 공부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공무원]] 시험같은 지엽적 문제에서 파사 이사금의 [[업적]]이 출제된 적이 있다. 2019 계리직 [[한국사(교과)|한국사]] 문제에서 가장 어려웠던 4번 문제 실직국과 압독국을 정복하였다. 이 선지 때문에 정답률이 가장 낮았다. 7급에서도 잘 언급을 안한 1세기 사건을 찾는 게 관건으로 나머지 선지도 4번(상복법, [[지증왕]])을 제외하면 지엽적 문제가 출제되었다. == 파사이사금 대의 인물 == * 길원 * 보제 * 사성부인 * 윤량 * 장세 * 계기 * 명선 == 《[[삼국사기]]》 기록 == [include(틀: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66&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삼국사기》 <파사 이사금 본기]]>''' 一年秋九月 파사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진휼을 베풀고 사면을 단행하다 三年春一月 농사를 권장하고 군사를 단련시키다 五年春二月 명선을 이찬으로 삼고 윤량을 파진찬으로 삼다 五年夏五月 풍년이 크게 들다 六年春一月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다 六年春二月 길원을 아찬으로 삼다 六年夏四月 객성이 자미에 들어가다 八年秋七月 성루를 수리하고,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다 十一年秋七月 공적인 일과 전야 개척에 힘쓰지 않는 주주·군주를 내치다 十四年春一月 윤량을 이찬으로 삼고 계기를 파진찬으로 삼다 十四年春二月 고소부리군에 순행하다 十四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十五年春二月 마두성에서 가야군을 격퇴하다 十五年秋八月 알천에서 열병을 하다 十七年秋七月 금성 남쪽의 나무가 바람에 뽑히다 十七年秋九月 가야의 습격을 격퇴하다 十八年春一月 가야를 정벌하려다가 중지하다 十九年夏四月 가뭄이 들다 二十一年秋七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二年春二月 [[월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七月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기다''' 二十三年秋八月 [[실직곡국]]과 [[압독국]]이 항복해 오다 二十三年冬十月 겨울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다 二十五年春一月 운석이 비처럼 쏟아지다 二十五年秋七月 실직의 반란을 평정하다 二十六年春一月 백제가 화해를 청하다 二十六年春二月 눈이 3척이나 내리다 二十七年春一月 압독에 행차해 진휼하다 二十七年春三月 왕이 압독으로부터 돌아오다 二十七年秋八月 마두 성주가 가야를 정벌하다 二十九年夏五月 각 지를 진휼하고 여러 나라를 병합하다 三十年秋七月 메뚜기 피해를 막기 위해 제사지내다 三十二年夏四月 성문이 저절로 무너지다 三十二年夏五月 비가 오지 않다 三十三年冬十月 왕이 죽다 38 항목으로 [[기록]]이 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특히 비슷한 시기의 백제 왕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 참고 항목 ==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C%82%AC_%EC%9D%B4%EC%82%AC%EA%B8%88|위키백과]]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각주] [[분류:112년 사망]][[분류:이사금]][[분류:밀양 박씨]][[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파사 이사금, d=2023-01-22 03:5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