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Fausto dos Santos.jpg|width=100%]] || || 이름 || 파우스투 두스 산투스[br](Fausto dos Santos) || || 생년월일 || [[1905년]] [[1월 28일]] || || 사망년월일 || [[1939년]] [[3월 28일]] || || 국적 || [[브라질]] || || 출신지 || [[마라냥]] 주 코도(Codó) || || 포지션 || 하프백 || || 신체조건 || 186cm / 75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방구 AC (1926-1928)[br][[CR 바스쿠 다 가마]] (1928-1931)[br][[FC 바르셀로나]] (1931-1932)[br]YF 취리히 (1933)[br]CR 바스쿠 다 가마 (1933-1934)[br][[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나시오날]] (1935)[br][[CR 플라멩구]] (1936-1937) || || 국가대표 || 4경기 / 0골(1930) || [목차] == 개요 == > Maravilha Negra[* 마라빌랴 네그라. 경이로운 [[흑인]]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이다.] 브라질의 전 축구선수. == 생애 == === 어린 시절 === 파우스투는 매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을 보다 못해 마라냥에서 대뜸 수도[* 당시 브라질의 수도는 히우지자네이루가 맞다. [[브라질리아]]가 브라질의 수도가 된 것은 1960년대이다.] [[히우지자네이루]]로 이사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히우지자네이루는 도시 곳곳에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벌판이 있어서 파우스투 역시 공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 클럽 === 1926년 키 크고 마른 체형의 파우스투는 AC 방구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데뷔할 때의 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 여기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에이스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다소 자유분방한 성격이었고, 티노코라는 친구의 설득에 의해 2년 만에 [[CR 바스쿠 다 가마]]로 팀을 옮겼다. 당시 바스쿠 다 가마는 상 자누아리우 구장을 새로 지으면서 명문으로 발돋움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고 그 계획 중 하나로 파우스투를 사온 것이다. 그 외에도 브릴련치, 후시뉴, [[이탈리아(축구선수)|이탈리아]] 등의 선수들로 스쿼드를 보강하였고 파우스투와 바스쿠 팀이 모두 성장세를 보이며 팀을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실로 1929년에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파우스투는 월드컵을 거치면서 브라질을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팀 내에서 파우스투는 차별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로 인해 폭발하기도 했고 팀에서 갈등이 생겼다. 이 와중에 바스쿠가 유럽 투어를 나갔고 [[FC 바르셀로나]]와 친선 경기를 가졌다. 바르셀로나가 파우스투의 플레이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 활약을 바탕으로 골키퍼 자구아리와 함께 [[프리메라 리가|스페인]]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하며, 한 편으로는 건강이 나빠져 바르셀로나에서 더 이상 뛸 수 없었고, 스위스의 YF 취리히에서 뛰기도 하였다. 취리히에서 나올 무렵 파우스투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친정팀 바스쿠 다 가마에 돌아왔다. 이 무렵 바스쿠 다 가마는 기존 멤버였던 이탈리아와 함께 [[도밍구스 다기아]]도 합류하여 꽤 강팀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우승을 맛보았다. 그리고 바스쿠 다 가마를 거쳐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우루과이]]의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나시오날]]과 [[CR 플라멩구]] 등을 떠돌았다. 1937년 플라멩구를 나올 때 감독과 포지션 문제로 마찰이 있기도 했고, 이 문제로 인해 팀에서 나와야했다. 1938년 무렵 파우스투는 다시 월드컵 대표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각혈]]을 할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빠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1939년, 34살의 나이에 오랜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파우스투는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초대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브라질의 2경기에 모두 참가하였다. 그 외에 공식 경기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와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와의 A매치에 참가하였다. 번외 경기로 [[페렌츠바로시 TC]]와 [[CA 리버 플레이트]]와의 경기에 참가한 기록도 있다. 이후에 월드컵에서 다시 뛰고 싶었던 파우스투는 월드컵 대표팀의 문을 두드렸지만 지병이었던 결핵 때문에 대표 선수가 되지 못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당시 바스쿠 다 가마와 브라질을 대표하던 하프백. 좋은 테크닉과 강력한 킥, 정확한 볼터치로 명성을 날렸다. [[지지뉴]]의 등장 이전에 기술로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 > 그는 다른 선수들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수 있는 것을 너무도 쉽게 해낸다. 파우스투는 센터 하프가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는지를 유럽에 가르쳐주러 왔다. >---- >한 프랑스 축구 신문(바르셀로나와의 시합 이후) > 우아한 가슴 컨트롤과 뛰어난 볼 컨트롤, 롱패스를 보유한 이 키 크고 강한 물라토는 브라질 유파 최초의 전통적인 미드필더였다. 그는 또한 사자의 용기와 항상 최선을 다하는 근성이 있었고, 그의 동료들에게 강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 >마우루 프라이스 == 뒷이야기 == * 파우스투는 말 수가 적었지만 플레이가 맘에 안 들거나 하면 갑자기 폭발할 때가 종종 있었다고 전해진다. 라커룸에서 소리를 지른다든가, 필드에서 잔디를 걷어찬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 1931년 9월 5일, 원래 우루과이와의 A매치가 있었지만 파우스투는 [[독감]]에 걸려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때 감기에 걸린 게 아니라 [[결핵]]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 결핵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파우스투는 [[FC 바르셀로나]] 역대 최초의 브라질리언이다. * 파우스투는 [[집시|보헤미안]] 같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 수상 == === 클럽 ===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2회: 1929, 1934([[CR 바스쿠 다 가마]])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준우승 3회: 1930([[CR 바스쿠 다 가마]]), 1936 LCF, 1937(이상 [[CR 플라멩구]])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5([[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나시오날]]) * 카탈루냐 컵 우승 2회: 1930–1931, 1931–1932([[FC 바르셀로나]]) [[분류:1905년 출생]][[분류:1926년 데뷔]][[분류:1937년 은퇴]][[분류:1939년 사망]][[분류:결핵으로 죽은 인물]][[분류:브라질의 축구선수]][[분류:방구 AC/은퇴, 이적]][[분류:CR 바스쿠 다 가마/은퇴, 이적]][[분류: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분류:나시오날/은퇴, 이적]][[분류:CR 플라멩구/은퇴, 이적]][[분류:브라질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참가 선수]][[분류:코도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