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김정일 시대]][[분류:김정은 시대]][[분류:평양시의 사건 사고]] [include(틀:김정일)] [목차] [clearfix] == 개요 == 2008년에서 2012년까지 벌어진, [[북한]]의 건설사업. == 상세 == 평양 10만호 건설 사업이 처음으로 관측된 것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의 2008년 1월 18일 보도이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52191|기사]] 이 기사에서 북한은 2012년까지 5년 이내에 10만 세대의 아파트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원래에는 [[장성택]] 당 행정부장 주도로 평양시 용성ㆍ서포ㆍ역포 지구에 3만 5천 세대, 2011년 말까지 만경대지구 3만 세대, '강성대국 원년'인 2012년 4월까지 만경대지구 3만 5천 세대 등 총 10만 세대를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110620073000043|기사]] 200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은 전형적인 북한식 [[속도전]] 방식으로 무작정 사람들을 동원해서 닥치는 대로 세우고 있다. 이것도 원래는 평양에 흔히 지어지던 저층 [[아파트]] 식으로 건설을 하는 것이 목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김정일]]이 2010년 5월 방중 이후 '평양의 중심거리가 이렇게 한심하니 좀 잘 건설합시다' '평양을 [[상하이]]처럼 만들라' 는 지시를 내려서 '''40여 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과감한 계획이 되었고, 2011년 10월 10일 당 창건일까지 모두 건설을 완료하려는 무리한 지시까지 내려왔었다고 한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num=92427&cataId=nk04500|관련 기사]] == 문제점 == * 북한의 자재난은 여전히 심각했다. 시내 지역에서는 그나마 자재가 공급되었으나, 시외 지역에서는 자재도 장비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전력, 장비는커녕 [[시멘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으니 사람을 모아놓은들 아파트를 지을 도리가 없었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건축자재 수입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는 기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재는 부족했던 듯 하다.[[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construction-12302010131328.html|관련 기사]] * 부족한 물자를 공사현장에 모으느라 공사 기간 중에 전력난, 식수난이 급등하였다.[[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201/h2012011912502974760.htm|관련 기사]] * 무리한 공기단축을 위해서 인해전술을 펼치려고 군인은 물론, 2011년에는 [[대학생]]들까지 강제로 휴학을 시키고 투입했다. 당연히 건설 경험이 없는 미숙한 대학생들이라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추락해서 목숨을 잃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물론 미숙한 인력이 건설한 만큼 부실공사의 가능성은 더 심각해졌다.[[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9416|관련 기사]] 일부 간부 집안 대학생은 [[뇌물]]을 바치고 동원에서 해방되는 비리도 있었다고 한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500&num=91764|관련 기사]] == 결말 == * 결국 2년 정도 지난 2011년 6월 20일 최종적으로 2만~2만 5천 세대 정도로 '''목표를 크게 축소하고 중지하였다.''' 특히 만경대구역 건설은 아예 포기한 데다가 2010년 말 기준으로 완공 실적은 고작 '''500세대'''에 불과했고,[* 예술인 아파트 2개동(23층) 200세대, 해방산구역 간부 아파트 7개동(9~14층) 300세대.] 그것도 전부 [[중구역]] 한 곳에서만 건설된 것이라고 한다. [[https://www.yna.co.kr/view/AKR20110620073000043|관련 기사]] * 본래 [[김정은]]의 치적 사업으로 삼는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자신들도 민망했는지 제대로 언급도 되지 않고 넘어가버렸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700&num=95223|관련 기사]] * 평양 시내 쪽의 2 ~ 3만 세대 정도 건설이 된 건물도 단지 외장만 올라갔을 뿐, 내장이 되어 있지 않았으며 주민들에게 자체적으로 알아서 하라는 지시만 내려왔다. 당연히 불만 투성이라고 한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500&num=88857|관련 기사]] 근데 탈북기자 [[주성하]] 기자는 원래 북한에서는 인테리어 없이 분양한다고 언급했다. * 결국 대부분 미완성. 건설이 중단된 아파트들은 흉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류경호텔]] 하나만으로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런 폐허들을 잔뜩 만들어 놓았으니 기가 막힐 지경. 부지 확보를 위해 주택을 철거당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사업을 시작하지 않으니만 못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num=100411&cataId=nk04500|관련 기사]] * 철거민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이 없는 것은 물론 거주지조차 마련해주지 않고 아무 집에나 임의로 들여보내 두 가구가 한 집에 살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정작 아파트 건설은 실패해서 중단돼버렸다. 이렇게 두 가구가 얹혀살게 된 집에서는 나가라는 원주민과 달리 나갈 곳이 없는 철거민들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 부실공사가 심각해서 몇년 이내에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5Bfc%5D=2&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4055|관련 기사]] [[평양 아파트 붕괴사고|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 그나마 완공된 아파트도 전력 및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저층이 인기라고 한다. 전력 공급이 특정 시간대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엘리베이터가 운행하지 않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즉 전력 공급이 끊기는 때에는 40여 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또한 수도 역시 공급 수압이 낮아 사실상 단수나 다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고층은 소위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9/04/275417/|#]] == 재개(?) -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 == 이후 이 기획은 [[김정은]][* 아이러니하게도 10만세대 건설사업의 주도자였던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 인물이기도 하다.] 집권 10년차인 2021년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으로 다시 실현되게 되었다. 첫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수치로 떨어지긴 했어도 10만호 건설사업은 이로써 10여년만에 재개되었다. 이전에도 [[창전거리]], [[미래과학자거리]], [[려명거리신도시]]처럼 평양의 신시가지[* 사실 신시가지라고는 해도 남한 기준으로 보면 규모가 대규모 아파트단지 수준이다. 창전거리와 미래과학자거리는 3000세대에도 못 미치고 려명거리신도시도 5000세대 가량에 불과하니...]를 만들었던 김정은은 2021년 1월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에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평양에 해마다 1만 세대씩 모두 5만 호의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고, 이 일환으로 2022년 [[송신·송화지구]], 2023년 [[화성지구]] 1단계가 완공되었으며, 2024년 [[화성지구]] 2단계가 완공될 예정이고, [[서포지구]]도 2024년 완공될 가능성이 높다. 이 건설을 위해 평양시에 있던 논밭 174헥타르(약 53만 평)[* [[여의도]] 면적의 약 60%나 되는 규모다.]을 뒤엎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이만한 논에서는 5천 명이 1년 동안 먹을 쌀/1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옥수수를 재배할 수 있다고 한다. [[https://www.rfa.org/korean/news_indepth/nkconstruction-03202023113440.html|#]] 2021년 3월 23일 송신·송화지구 착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의 연설에 따르면 이 사업은 '수도 시민들에게 보다 안정된 생활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벼르고 준비해 온 숙원 사업'이며 '우리 당과 정부에 있어 최중대 과업으로 간주된다'고 말했고, '이 막중한 과제를 어떤 불리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감당해야 할 혁명 과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언급도 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19132#home|#]] 2021년 4월 11일 [[조선신보]]는 평야 5만세대 건설사업에 대해 '도시 구획을 동서방향과 북쪽방향으로 넓히면서 대규모의 현대적인 새 거리들을 일떠세우는 역사적인 건설사업'이라고 언급했으며, 평양 외곽 지역의 5만 호 외에도 [[중구역]] [[승리거리]]에도 고층 살림집을 위시해 1만 6천 세대가 세로 건설되고 있다고 한다. 조선신보에서는 5만 호가 들어설 구역으로 송신지구, 송화지구, 금천지구, 9.9절거리지구[* 1998년 개통된 거리, [[금수산태양궁전]]과 잇닿은 림흥 로타리로부터 [[형제산구역]] 신미동까지 약 8km 길이의 거리다.], 서포지구[* 평양 중심부로부터 북쪽방향 평양 비행장으로 향하는 길 도중 형제산구역 내에 있으며 신미동에 위치하고 있다.]를 언급하고 있는데, 송신·송화지구는 완공되고 서포지구는 그대로 건설 중이며, 9.9절거리지구와 서포지구는 취소되고 화성거리 계획으로 변환된 것으로 보인다. [[https://www.spnews.co.kr/news/articleViewAmp.html?idxno=38318|#]] == 남한과의 비교 == 남한은 북한보다 20년도 더 전에 10만 호를 넘어 '''백만 단위 호 건설''' 계획을 세웠으며, 둘 다 백만 단위의 집을 짓는 데에 성공했다. * [[노태우 정부]]: 공약으로 '''200만 호 건설 사업'''을 내세웠는데, 북한의 계획으로부터 '''20여년 전'''인 1989년에 시작된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한 수치'라는 말이 나왔지만 예상보다 1년 이상 앞선 1991년 8월 말에 조기 달성되었다. 물론 5대 [[1기 신도시]]에 지은 주택 총합은 30만 호 정도였으나, 나머지 170만 호는 수도권의 택지지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https://www.korea.kr/special/policyFocusView.do?newsId=148620166&pkgId=49500196|#]] * [[전두환 정부]]: 무려 '''500만 호 건설 사업'''을 기획했으나 이는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용 홍보에 불과한 비현실적인 목표라 목표의 1/3 정도만 달성하며 대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조차 176만 호를 짓는 데에는 성공했다. 더구나 북한의 '평양 5만세대 건설사업'보다 30년 앞서 건설된 [[분당신도시]]만 해도 1991~1996년까지 5년 동안 '''10만 가구'''가 건설되었다.[* 1년 동안 지은 가구 수만 해도 북한의 2배에 달하는 셈이다.] 북한은 '최중대 과업'으로 간주하는 것조차 30년 전의 남한보다도 훨씬 열악한 수준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