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백제의 대외전쟁)] ||<:> '''{{{#ffffff,#191919 평양성 전투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근초고왕)] [include(틀:고구려의 대외전쟁)] }}} || ||<-3> {{{+1 '''평양성 전투[br]平壤城戰鬪'''}}} || || '''시기''' ||<-2><(> [[371년]] 10월(음력) || || '''장소''' ||<-2><:>{{{#!wiki style="margin: -6px -10px 0px" [include(틀:지도, 장소=평양시 평천구역, 높이=200, 너비=100%)][br][include(틀:지도, 장소=평양시 중구역, 높이=200, 너비=100%)] [[고구려]], [[평양성]][br](현재 [[평양시]] [[평천구역]] 및 [[중구역]] 일대)}}} || || '''원인''' ||<-2><(>[[고구려]]의 [[치양 전투|예방전쟁]] 실패 후, [[백제]]의 반격. || || '''교전 세력''' ||<:> '''백제'''[br]{{{-2 (공격자)}}}[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red; font-size: 1.2em" {{{#white '''승'''}}}}}} ||<:> '''고구려'''[br]{{{-2 (수비자)}}}[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blue; font-size: 1.2em" {{{#white '''패'''}}}}}} || ||<|2> '''주요 인물'''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C00D45; font-size: .8em" {{{#white '''지휘관'''}}}}}}[br][[백제|[[파일:백제 군기.svg|width=20]]]] '''[[근초고왕]]''' {{{-3 (백제 국왕)}}}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C00D45; font-size: .8em" {{{#white '''지휘관'''}}}}}}[br][[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 '''[[고국원왕]]''' [[전사|†]] {{{-3 (고구려 국왕)}}}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C00D45; font-size: .8em" {{{#white '''참가자'''}}}}}}[br][[백제|[[파일:백제 군기.svg|width=20]]]] '''[[근구수왕|부여구수]]''' {{{-3 (백제 태자)}}}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C00D45; font-size: .8em" {{{#white '''참가자'''}}}}}}[br][[고구려|[[파일:고구려 군기.svg|width=40]]]] '''[[소수림왕|고구부]]''' {{{-3 (고구려 태자)}}} || || '''병력''' || 30,000명 || 병력 규모 불명 ||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고국원왕|최고 지휘관]] 전사[br]그외 피해 규모 불명 || || '''결과''' ||<-2><(> 백제의 승리 || || '''영향''' ||<-2><(> 백제, 한반도 주도권 장악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발발한 전투. [[백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전투이자, [[고구려]] 역사상 왕이 전사한 유일한 전투이기도 하다. == 배경 == * 관련 내용은 [[치양 전투]]도 참고.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 지역.png|width=100%]] }}} || || {{{#000000 ▲[[치양 전투|치양]]과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의 위치 }}} || [[치양 전투]]에서 [[근초고왕]]과 태자인 [[근구수왕|부여구수]]의 활약에 패배한 고국원왕은 또 다시 군대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했다. >26년(서기 371년),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하지만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전략을 예상하고 오히려 매복을 통해 패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는데, [[근초고왕]]은 두 차례의 공격을 물리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진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왕|부여구수]]와 함께 백제 정예병력 30,000명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 전투 양상 == >371년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0,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82&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 >41년(서기 37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병사 30,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51&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근초고왕의 정예병 30,000명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고국원왕]]은 태자 고구부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 방어에 나섰다. 당시 평양성은 수곡성과 함께 대(對) 백제 전선을 상대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고국원왕]]이 갑오(甲午)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백제의 공격을 대비해 성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전투는 무척이나 치열하게 펼쳐진듯 보이는데 <근초고왕 본기>에는 '고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高麗王斯由 力戰拒之)했다는 대목이 보여진다. 고구려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황색 깃발의 백제군의 공격은 매서웠는데 때 마침 고구려의 국왕이자 고구려군의 총지휘관인 [[고국원왕]]이 적군의 눈먼 화살[* 유시(流矢). 누가 쏘았는지 알 수 없는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백제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현재까지는 [[고구려]]군의 방어도 거셌지만, 백제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퇴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전투 이후 == === 고구려 === 이때 화살을 맞은 [[고국원왕]]은 10월 23일에 화살의 상처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고, 이후 고구려는 [[태자]]였던 고구부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소수림왕]]이다. 고국원왕은 고국원(故國原)이라는 지역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했다고 한다.[* 원래 국원이라 불렸으나 천도 후에 옛 고가 덧붙여진 것이다. 이름으로 봐서 수도 근처의 들판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구려는 이때의 패배로 인해서인지 이후 [[금석문]] 등에 백제를 일컬어 '''백잔'''(百殘, 백제 떨거지 놈들)[*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고구려인들이 백제를 비하해 '백제 떨거지 놈들'이라는 의미로 부른 멸칭이다.]이라는 비하적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공문서에 "북괴" 같은 비하 단어를 쓴 셈(...)[* 반대로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기]]》(百濟記) 등의 백제 사서에서는 "짐승 박(狛)"자를 고구려 지칭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백제]]에서는 고구려를 '''짐승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광개토대왕릉비]]』}}} === 백제 === [[백제]]는 [[대동강]] 근처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평양성 전투 이후 도읍을 한산성(漢山城)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삼국유사]]》에는 남평양을 빼앗아 북한성으로 천도하였다고 언급된다.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서기 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수도를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州)】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608&cid=49616&categoryId=49616|-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현재는 전하지 않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책을 인용한 기록이다.}}} 삼국사기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과, <[[소수림왕]]본기>에 백제가 평양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남평양=평양성으로 놓고 볼 경우 삼국유사의 오류가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남평양은 평양성이 아닌 옛 고구려 북한산군의 별칭으로 한강 이북(후의 고려의 부수도 남경이자 조선의 수도 [[한성부]])을 가리킨다고 적혀있다. 위의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현 고려의 양주를 가리킨다고 적혀있는데 남경은 양주에서 독립한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취합해도 모순될 게 없어진다. 한편 이 전투는 백제로서는 꽤 자부심이 있던 전투였는지 훗날 [[개로왕]]이 [[북위]]에 지원을 바라는 표문에도 "그 때 우리가 고구려 왕 목을 벨 정도로 발라버려서 고구려놈들은 남쪽만 보면 지려버린당께요."라고 쓰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후 대노한 [[장수왕]]이 이끌고 온 고구려군에게 백제군이 개박살나고 개로왕 본인은 전장 한복판에서 아군 측에서 죄를 짓고 도망갔던 배신자들에 의해 처형당하는 고국원왕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 이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와 백제 양국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된다.] >[[고국원왕|쇠(釗)]]가 경솔하게 (우리와의) 우호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치양 전투|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근구수왕|수(須)]]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 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후략)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91&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25권 <백제본기> 제3 -개로왕]]-}}} 그리고 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이를 두고 "전공을 과장했다." 고 평가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 >{{{#!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사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751&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전투 준비를 하는 고무 & 구부 & 사유 & 소우.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전투 준비를 하는 부여근 & 부여구 & 부여구수.png|width=100%]]}}}|| > '''[[고국원왕(근초고왕)|고국원왕]]: 기어이 이 [[평양성]]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오냐, 이번에는 반드시 [[근초고왕(근초고왕)|네놈]]의 목을 베어주마!''' > '''[[근초고왕(근초고왕)|근초고왕]]: 드디어 [[고국원왕(근초고왕)|사유]]와의 길고 긴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다. [[평양성]]을 공격하라!''' * [[근초고왕(드라마)|KBS의 사극인 근초고왕]] 55화에 등장. 하지만 철수가 지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언급되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언급되는 기록을 보면 평양성 전투는 371년 겨울인데 반해, 지진이 일어난 건 372년 가을이다. 드라마 진행을 위해 각색을 한 듯 보인다. * [[천년의 신화]]에서도 백제 마지막 시나리오로 등장. 여기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전체 시나리오를 통틀어서 한 국가의 영웅이 유일하게 모두 나오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 관련 문서 == * [[평양성 전투]] [각주] [[분류:4세기]][[분류:공성전]][[분류:한국사/전투]][[분류:근초고왕]][[분류:근구수왕]][[분류:고국원왕]][[분류:평양시의 역사]][[분류:평양시의 사건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