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평택시)] [목차] == 개관 == 역사적으로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3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기준선은 [[안성천]]과 [[진위천]]의 두 하천으로서, 진위천 서부의 광활한 평야지역(안중을 중심으로 한 서부)은 '''[[화성시|수원]]''', 안성천 이북(진위, 송탄, 평택 시가지 일대)은 '''진위와 양성''', 안성천 이남(팽성읍)은 '''평택'''[* 정작 현재의 평택 시가지(시내 동지역)는 원래 평택이 아니라 진위의 영역이었다.], 이렇게 세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렇게 세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조선시대엔 저 하천들이 '''[[감조하천]]'''이라 바닷물이 들어오던 하천들로, 사실상의 바다로 보면 된다. 이는 조선시대 당시의 인프라 수준으로는 충분히 큰 자연 경계였고, 자연스럽게 행정구역이 서로 다르게 되는 이유였다고 생각하면 된다. 팽성 밑에 있는 [[아산시]] 둔포에도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 까지는 바로 동네 앞까지 바닷배가 들락날락 하던 곳이라 포(浦)라는 이름이 붙었고, 평택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군문교(옛 군물포) 근처까지 바닷배들이 들락날락 거렸다. 아직도 세개의 권역으로 알게 모르게 서로 나뉘어져 있는 이유가 바로 하천을 비롯한 지형의 영향이다. ==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 구 진위군 일대는 백제의 금산, 연달부곡 구 평택군 일대는 백제의 아술현에 속하였다가 하팔현 (또는고하현)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다가 안성천 이북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 이후 부산현이 되었다. 지금의 서평택 지역인 안중읍에는 차성현또는 거성현(현 청북 안중일대 화성양감일대 ) 이었다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부산현이 진위현으로, 하팔현이 팽성현으로 개칭되었다. == [[고려]] == [[왕건|태조]] 때 팽성현이 평택현으로 개칭되었다.[* 천안부 소속] 양성현[* 현 안성시 양성면, 원곡면, 공도읍]의 일부를 떼서 영신현[* 대략 지금의 평택 시가지과 영역이 비슷하다. 중심지는 현재 동삭동 일대.]을 만들었다. 서평택지역은 차성현에서 용성현(용성리 일대)으로 개칭되었고 현덕면 일대는 광덕현이 되었다 고려 후기에 안성천이북에는 진위현 송장현 영신현 양성현 용성현이 있었고 안성천이남에는 평택현과 경양현이 있었다. [[공민왕]] 대에 진위현, 평택현은 [[충청도]]에 속하였다. == [[조선]] ==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3_004|진위현]] [* 지금의 진위면, 서탄면, 고덕면 중 두릉천 이남 지역, 송탄, 평택 동지역이다. 고려 시대부터 충청도였다가 조선 초기에 잠시 [[경기도]]였고, 1506년부터 1896년 8월까지는 [[충청도]]였으나, 그 이후에 잠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역사가 평택현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진위현은 [[충청도]]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역사학자들의 견해이고, 평택문화원의 공식 견해이다.]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5002_010|평택현]] [* 지금의 팽성읍. 역사적으로 평택은 쭉 충청도에 속했다. 1896년까지는 충청도 평택현, 1914년까지는 충청남도 평택군이었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4003|수원도호부]] [* 지금의 안중읍, 포승읍, 청북읍, 오성면, 현덕면, 고덕면 중 두릉천 이북 지역.] [[태조(고려)|태조]] 때 진위현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세종 때 영신현 송장현이 진위현으로 내속되었다. 그리고 용성현 지역이 수원도호부에 편입되었다. 평택현은 [[연산군]] 대에 처음으로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그 이유는 금표(왕 전용지, 민간인 출입 금지)의 지나친 확장으로 경기도의 관할구역이 축소되자, 평택·진위 등의 몇몇 군현을 충청도에서 떼어다 붙인 것. 진위군은 [[중종(조선)|중종]] 대인 1506년 다시 충청도로 복귀했으나[* 이에 따라 [[충청 방언]]권이라는 설이 다수설이며, 평택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들도 [[충청 방언]], 즉 [[충청남도]] 방언을 쓴다고 인정한다. 실제로 평택시 전 지역은 충청 방언 중 천안 방언권이다.], [[고종(대한제국)|고종]] 대인 1896년에 이르러 진위군은 경기도로 다시 편입되었다. 그러나 평택군은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여전히 충청남도 관할로 남아 있었다. 안중면은 충청도 직산현의 월경지였다. 당시의 안중면과 지금의 안중읍(면)은 중심지가 안중리라는 것만 빼면 다 다르지만. [[파일:평택_1895년.png]] 구한말 평택, 진위, 수원의 행정구역 상황. 1906년 양성군과 [[직산군]]의 월경지는 주변 군현으로 편입되며 일괄적으로 정리된다. == [[일제강점기]] == [[파일:평택_1914년.png]]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평택·진위·수원의 일부를 통합하여 출범한 진위군의 행정구역 상황. 자세히 알고 싶으면 [[http://sisa.pyeongtaek.go.kr/bbs/board.php?bo_table=ca01&wr_id=28|여기]]로 1914년 충청남도 평택군 및 경기도 수원군의 일부를 '''진위군'''으로 통합하면서, 현재의 평택시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 당시 진위군청은 북면(현 [[진위면]])에 두었다가, 1926년 병남면으로 이전하였다. 1931년 병남면이 평택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34년 부용면과 서면이 팽성면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개칭되고, 동시에 평택면이 평택읍으로 승격되었다. == [[대한민국]] == ||<-1> [[파일:평택군 군기.svg|width=100%]] ||<-1> [[파일:송탄시기(1981-1994).svg|width=100%]] ||<-1> [[파일:평택시 시기(1986-1995).svg|width=100%]] || ||<-3> 도농복합시 출범 이전의 평택군, [[송탄시]], 평택시 깃발 || ||<-3> [[파일:평택시 CI(1995-2020).svg|width=100]] || ||<-3> 1995년 통합 이후 2020년까지 사용한 평택시 로고 || 해방 이후 1948년 북면을 [[진위면]]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1979년 팽성면이 [[팽성읍]]으로 승격되었다. * [[1995년]] 평택시·송탄시·평택군 통합 직전 행정구역 상황. [[파일:평택_1995년.png]] [[1981년]] 송탄읍이 '''[[송탄시]]'''로 승격[* 읍 승격은 송탄이 평택보다 늦었으나, 시 승격은 오히려 송탄이 더 빨리 이루어졌다(...). 평택은 일반적인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송탄은 [[오산 공군기지]]의 배후 상권으로서 조금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되어 분리되었다. [[1983년]] [[안성시|안성군]] [[원곡면]] 용이리, 죽백리, 청용리, 월곡리, [[공도읍|공도면]] 소사리가 평택읍으로 편입되었으며, [[1986년]] 평택읍도 '''평택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의 3개 행정구역이 공존하게 되었다. [[1987년]]엔 [[화성시|화성군]] [[양감면]] 고렴리가 [[청북읍|청북면]]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오성·청북·포승·현덕면의 각 일부를 떼어내어 안중면을 신설하였다. 당시 평택군의 군청은 현 비전동 632-4번지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이 다시 통합되어 오늘날의 도농복합형 '''평택시'''가 되었다. 이때, 진위면 갈곶리, 청호리, 고현리의 일부가 [[오산시]]에 편입되었다. 이후 [[2002년]] 안중면이 안중읍으로, [[2006년]] 포승면이 포승읍으로, [[2016년]] 청북면이 청북읍으로 승격되고, [[2021년]] 고덕면 일부가 고덕동으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각주] [[분류:평택시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