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원위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C0013 0%, #DC143C 20%, #DC143C 80%, #9C0013); color: #ece5b6" '''북위 제13대 황제[br]{{{+1 안정왕 | 安定王}}}'''}}} || ||<|2> '''출생''' ||[[513년]] || ||[[북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즉위''' ||[[531년]] [[10월 31일]] || ||[[북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서쪽[br](現 [[허난성]] [[뤄양시]]) || ||<|2> '''사망''' ||[[532년]] [[12월 26일]] (향년 19세) || ||[[북위]] [[허난성|하남군]] [[뤄양시|낙양]] 문하외성[br](現 [[허난성]] [[뤄양시]]) || || '''능묘''' ||업성 서남쪽 야마강 || ||<|2> '''재위기간''' ||'''{{{#ece5b6 제13대 황제}}}''' || ||[[531년]] [[10월 31일]] ~ [[532년]] [[6월 6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원(성씨)|하남 원씨]] || || '''휘''' ||랑(朗) || || '''부모''' ||부왕 장무왕[br]모후 부인 정씨 || || '''형제자매''' ||4남 중 차남 || || '''종교''' ||[[불교]] || || '''자''' ||중철(仲哲) || || '''작호''' ||'''안정군왕(安定郡王)''' || || '''제호''' ||후폐황제(後廢皇帝) || || '''연호''' ||중흥(中興, [[531년]] ~ [[532년]])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13대 황제. 폐위되었기에 묘호와 시호는 없으며, '폐황제'(廢皇帝)로만 불린다. == 생애 == 제3대 세조 [[태무제]]의 장남인 경목제 [[탁발황]]의 현손으로, 장무왕(章武王) 원융(元融)과 정씨(程氏)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었다 531년에 기주(冀州) 발해군(渤海郡)의 태수(太守)를 맡았다. 당시 북위 조정에서는 이주세륭이 제11대 [[장광왕]] 원엽을 폐위하고 제12대 [[절민제]](전폐제) 원공을 옹립했는데 [[고환(남북조시대)|고환]]은 이주씨 일족의 토벌을 내세우며 신도(信都)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그해 음력 10월 6일에 손등(孫騰)의 요청을 받아들여 원랑을 제13대 황제로 옹립했다. 원랑은 신도성의 서쪽에서 즉위한 후, 연호를 중흥(中興)으로 바꿨다. 이로써 북위는 절민제 원공과 원랑 두 명의 황제가 내세워져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신제 원랑은 자신을 옹립한 고환을 시중, 승상, 도독중외제군사, 대장군, 녹상서사, 대행대(大行臺)로 삼고, 고건(高乾)을 시중, 사공으로 임명했다. 또한 고오조(高敖曹)를 표기대장군, 의동삼사, 기주자사로 삼고, 손등을 상서좌복야, 하북행대로 삼았으며, 위란근(魏蘭根)을 우복야로 삼았다. 532년 음력 2월 26일에 이주조에게 살해된 이전의 황제 원자유에게 경종(敬宗)의 묘호와 무회황제(武懷皇帝)의 시호를 추숭했다. 2월 29일에 고환을 대승상・주국대장군(柱国大將軍)・태사(太師)로 삼았고, 음력 3월 2일에 고환의 장남 [[고징]]을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 13일에 황제 원랑은 백관을 인솔하고 업(鄴)의 궁궐로 들어가 살았다. 이후 고환이 '''한릉(韓陵)산 전투'''에서 이주천광의 대군을 대파하자 절민제 원공이 중서사인 노변(盧辯)을 보내 업성에서 고환을 위로하게 했다. 이에 고환은 그로 하여금 황제 원랑을 알현케 했으나 노변이 항의하며 사양하고 좇지 않으니 고환이 꺾지 못하고 놓아주었다. 음력 4월 8일에 표기대장군, 행제주사(行濟州事) [[후경]]이 항복해오자 상서복야, 남도대행대, 제주자사로 삼았다. 4월 13일에 안동장군(安東將軍) 신영(辛永)이 건주(建州)를 가지고 항복해왔다. 4월 18일 황제 원랑이 수도 낙양 북쪽의 망산(邙山)에 도착했는데, 고환은 원랑이 경목제 [[탁발황]]의 현손이었던 까닭에 원랑과 소원(疎遠)해졌다. 그래서 고환은 [[절민제]] 원공의 사람됨을 관찰하여 다시 그를 받들려고 했으나 절민제의 정신이 고상하고 밝아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절민제를 폐위했다. 이후 고환이 평양왕(平陽王) 원수를 찾아내 제14대 황제로 세우려고 하자 원수는 마침내 황제 원랑으로 하여금 조책(詔策)을 만들어 제위를 선양하게 했다. [[효무제(북위)|효무제]]가 옹립되자 원랑은 다시 안정군왕으로 강봉되었으나 그해 음력 11월 14일에 효무제의 명령으로 동해왕(즉 장광왕) 원엽과 함께 살해되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분류:남북조시대/황제]][[분류:탁발선비]][[분류:폐위된 군주]][[분류:513년 출생]][[분류:532년 사망]][[분류:뤄양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