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2> '''{{{#fff 북위의 황후[br]{{{+1 廢皇后 | 폐황후}}}}}}''' || || '''[[시호|{{{#fff 시호}}}]]''' ||<(> 없음 || || '''[[성씨|{{{#fff 성}}}]]''' ||<(> 풍(馮) || || '''{{{#fff 생몰연도}}}''' ||<(> 미상 || || '''{{{#fff 능묘}}}''' ||<(> 미상 || || '''{{{#fff 본적}}}''' ||<(>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 || ||<|2> '''{{{#fff 재위}}}''' || '''{{{#fff 북위의 황후}}}''' || || [[493년]] [[5월 19일]] ~ [[496년]] [[7월]] || || '''{{{#fff 부친}}}''' ||<(> 풍희(馮熙) || || '''{{{#fff 부군}}}''' ||<(> 고조 [[탁발굉|효문황제]] (高祖 孝文皇帝) || [목차] [clearfix] == 개요 == 북위의 고조 효문제 [[탁발굉]]의 부인. [[문성문명황후 풍씨|풍태후]]의 조카. 태사 풍희의 딸. == 생애 == 태화 17년(493년) 4월, 효문제가 풍태후의 상을 마치자, 태위 탁발비(拓跋丕) 등이 상표하여 장추(長秋)가 세워지지 않고, 6궁(六宮)의 주인이 없어졌음을 들어 마땅히 황후를 세워야한다 건의하였다. 이에 효문제는 풍씨를 황후로 세웠다. 효문제가 남정을 단행했을 때 풍황후는 평성(平城)에 남아 황궁을 지켰으며, 이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하자 평성의 6궁을 인솔하여 낙양으로 이동했다. 태화 19년(495년) 2월에 풍황후의 오빠 풍탄(馮誕)이 사망하고, 그 다음 달인 3월에는 아버지 풍희도 연달아 사망하였다. 효문제는 글을 내려 슬픔에 잠긴 황후를 위로하고 이전보다 후히 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풍황후의 이복언니인 좌소의 풍씨를 환궁하면서부터 풍황후에 대한 애정이 시들어버렸다. 사실 풍씨는 풍황후보다 먼저 효문제의 후궁이 되었지만 병으로 잠시 고향에 내려가면서 황후가 되지 못 했던 것이라, 그녀는 풍황후 앞에서도 후궁의 예를 다하지 않았다. 풍황후는 비록 풍씨를 질투하지 않았으나, 풍씨의 무례한 태도에 무안해하며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두 자매는 서로 불화하기 시작했다. 태화 20년(496년) 7월, 풍씨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 풍황후를 헐뜯으니, 풍씨를 더 총애하던 효문제는 그녀의 말을 믿고 풍황후를 서인으로 폐출시켰다. 본래 덕과 지조가 있었던 폐황후 풍씨는 출가하여 요광사(瑤光寺)의 비구니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미디어 믹스 == * 중국의 드라마 〈북위풍태후〉에서는 "풍소원(馮妙媛)"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리이샤오]]. [[분류:남북조시대/황후]][[분류:몰년 미상]][[분류:헝수이시 출신 인물]][[분류:중국의 승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