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정치인]][[분류:로마 공화국/군인]][[분류:기원전 43년 사망]][[분류:전쟁 사망자]] ||||<#800080> {{{#ffffff {{{+3 '''폰티우스 아퀼라''' }}}[br]{{{-1 [[라틴어]]: Pontius Aquil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3년 4월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무티나 || ||<#800080> {{{#ffffff '''지위''' }}} ||[[플레브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폰티우스 아퀼라(아버지?)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호민관]], [[원로원]] 의원.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호민관]], [[원로원]] 의원.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의 가담자이다. == 행적 == 전체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아우구스투스]] 등은 코그노멘인 "아퀼라(Aquila)"만 언급했다. 키케로가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루키우스 폰티우스"가 언급되었지만, 이 인물이 '폰티우스 아퀼라'와 동일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수트리아에서 발견된 [[라틴어]] 비문에는 "푸블리우스의 아들인 '폰티펙스' 루키우스 폰티우스 아퀼라"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호민관 폰티우스 아퀼라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수트리아 출신의 다른 인물이라고 본다. 그가 처음으로 사료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45년이다. 당시 [[호민관]]이었던 그는 [[문다 전투]]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가장 위대한 로마인 중 한 사람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자녀와 가족을 파괴한 걸 기념하려고 개선식을 벌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처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카이사르가 백마를 몰고 지나갈 때 다른 이들과는 달리 일어나서 경의를 보내는 걸 거부했다. 그걸 본 카이사르는 그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봐, 아퀼라! 내게서 공화국을 되찾아보지 그래?" 그 후 카이사르는 누군가에게 약속할 때 이런 말을 꼭 덧붙였다고 한다. >"폰티우스 아퀼라가 이것을 허락하길 바란다.(Sitamen per Pontium Aquilam licuerit.)" [[아피아노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아퀼라가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발발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고 기술했다. 기원전 43년 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이자 카이사르 암살자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공격하면서 [[무티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진압군에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로 참여해 별도의 분견대를 이끌었다. 그 해 4월, 아퀼라는 무티나를 포위한 안토니우스의 군대와 격전을 벌인 끝에 안토니우스가 달아나게 했지만, 그 와중에 히르티우스와 함께 전사했다. 원로원은 키케로의 주도로 폰티우스를 위한 장례식을 치르고 공공 장소에 동상에 세워 국가를 위해 희생한 그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