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1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감찰관]][[분류:기원전 87년 사망]][[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1세기)] [include(틀:역대 로마 감찰관)]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br]{{{-1 [[라틴어]]: Publius Licinius Crass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87년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조부)[br]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br]베눌레이아(아내)[br]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장남)[br]가이우스(또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차남)[br][[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삼남)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97년 || ||<#800080> {{{#ffffff '''전임''' }}}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기원전 98년 집정관)|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br][[티투스 디디우스]] || ||<#800080> {{{#ffffff '''동기''' }}}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9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기원전 96년 집정관)|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br][[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96년 집정관)|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감찰관]].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아버지다. == 생애 == 로마 최고의 [[노빌레스]] 가문으로 손꼽히는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의 일원이다. 리키니우스 일족은 최초로 [[호민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364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가 집정관을 역임한 이래 고위 행정직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할아버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기원전 205년 집정관)|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의 조카로, 기원전 171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27년 또는 126년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아겔라토스(ἀγέλαστος: 우울한, 음산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사촌으로 당대 최고의 웅변가 중 하나이며 기원전 95년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있었다. 마크로비우스는 사치에 관한 법률을 제시한 호민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비투스를 언급했다. 이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로마인들에게 하루에 30아사리우스(assarius) 이상의 음식을 소비하지 말아야 하며, 식탁에 제공되는 말린 고기는 3파운드, 소금에 절인 생선 및 "땅, 포도나무 또는 나무에서 태어난 것"은 각각 1파운드 씩 제한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법은 정식으로 반포되기도 전에 효력을 발휘할 정도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고 덧붙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 법안을 반포한 인물이 기원전 97년 집정관을 맡게 될 크라수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디비투스라는 별명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이 법안을 반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는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이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에게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포한 뒤 이들을 처단하러 몰려든 귀족 무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 "모든 크라수스"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모종의 시기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97년 [[파트리키(계급)|파트리키]] 계급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9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가 집정관을 맡는 동안 특별한 일은 딱히 없었다. 단지 원로원의 법령에 따라 [[인신공양]]을 금지했을 뿐이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먼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고대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그가 [[대서양]] 어딘가에 위치한 것으로 간주되는 전설적인 섬인 카시테리데스(Cassiterides)에 대한 논문을 집필했다고 기술했다. 이 논문은 그가 총독을 맡던 때에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총독으로서 루시타니아인들과의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 뒤 기원전 93년에 돌아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하지만 루시타니아인과의 원정에 대해 전해지는 세부 사항은 없고, 단지 지역 주민들로부터 주석과 납을 구입했다는 것만 알려졌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을 때, 크라수스는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90년 집정관)|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티투스 디디우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102년 집정관)|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등과 함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루카니아에서 마르쿠스 램포니우스가 이끄는 적군에게 패배했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적군이 진영 옆의 숲에 불을 지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가 화마에 휩쓸리는 바람에 8,000명의 병력을 잃고 그루멘툼으로 후퇴해야 했다고 한다. 기원전 89년, 크라수스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이들은 희생제를 치렀지만 이탈리아 전역이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또한 2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고 귀순한 모든 이탈리아인을 로마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향과 외국 와인 수입에 대한 제한을 도입했다. 이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생필품 수입을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두 감찰관은 [[트로이]] 시에 속주세를 더 이상 매기지 않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88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지휘권을 놓고 분쟁을 벌인 끝에 내전이 벌어졌다. 술라는 로마에 무단으로 군대를 끌고 가서 마리우스 일당을 몰아낸 뒤, 정적들을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이때 크라수스는 술라 편에 서서 마리우스를 비난했다. 이후 술라가 동방으로 출진하고, 로마는 두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기원전 87년 집정관)|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87년, 킨나가 술라가 폐기했던 새로운 시민을 모든 부족에 분배하는 정책을 재추진했다가 동료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킨나는 남부 이탈리아를 돌며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아프리카로 망명했던 마리우스도 사병대를 이끌고 킨나에게 가담했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는 이에 대응해 로마 시 방어를 강화했는데, 크라수스는 옥타비우스가 선임한 도시 방어 책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야니쿨룸을 마리우스로부터 탈환하려는 옥타비우스의 시도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며, 나중에 [[삼니움]]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메텔루스 피우스]]를 찾아가 로마로 돌아와서 마리우스 일당을 몰아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킨나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해외로 망명하는 쪽을 택했고, 로마는 마리우스와 킨나의 수중에 넘어갔다. 기원전 87년 말, 마리우스, 킨나 등은 정적들을 대상으로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때 숙청 명단에 포함된 그는 장남 푸블리우스와 함께 달아났으나 추격대에게 붙잡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 또한 [[플로루스]]는 그들이 서로가 보는 앞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고 밝혔으며, [[아피아노스]]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아들을 죽인 뒤 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밝혔다. 키케로는 그의 저서에서 크라수스가 포로 신세를 피하기 위해 자살한 일에 관해 논했다. 그는 베눌레이아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가정 생활은 막대한 재산에 비해 검소했으며, 두 아들은 결혼한 후에도 계속 부모와 함께 살았다고 밝혔다. 장남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87년 아버지와 함께 피신하던 중 살해되었다. 차남은 이름이 가이우스인지 루키우스인지 분명하지 않으며,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요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막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목숨을 건져 숨어지내다가 기원전 83년 술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해 [[술라의 내전]]을 단행했을 때 즉시 가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이후 탁월한 재산 증식 능력을 발휘해 로마 제일의 부자가 되었고, 이를 바탕삼아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