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br]{{{-1 [[라틴어]]: Publius Mucius Scaevola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조부)[br][[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기원전 215년 법무관)|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버지)[br][[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기원전 174년 집정관)|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형제)[br]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아들)[br]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무키아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75년 || ||<#800080> {{{#ffffff '''전임''' }}} ||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br][[퀸투스 페틸리우스 스푸리누스]] || ||<#800080> {{{#ffffff '''동기''' }}}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18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800080> {{{#ffffff '''후임''' }}} ||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파울룰루스]][br][[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기원전 174년 집정관)|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노빌레스]] 가문인 무키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들은 [[에트루리아]]의 클루시움 군주인 포르세나가 로마를 침공했을 때, 포르세나를 암살하려 했다가 실패한 뒤 포르세나 앞에서 오른손을 스스로 불사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덕분에 풀려난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의 후손을 자처했다. 아버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기원전 215년 법무관)|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215년 [[법무관]]을 역임하면서 가문 최초로 고위 행정관에 이름을 남겼다. 형제로 기원전 174년 집정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기원전 174년 집정관)|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 있었다. 기원전 180년 형제 퀸투스와함께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로마 시의 사법 재판을 이끄는 법무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했으며, 로마와 주변 10마일 이내에서 벌어지는 연쇄 중독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는 기원전 180년 집정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기원전 180년 집정관)|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어머니 호스틸리아 콰르타가 자기 아들이 집정관 선거에 3차례 출마하여 모두 떨어진 것에 앙심을 품고, 플라쿠스를 대신해 집정관에 오른 남편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180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독살한 사실을 밝혀냈다. 호스틸리아는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플라쿠스는 집정관을 유지했다. 기원전 175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기원전 187년 집정관)|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지난해부터 로마에 반기를 든 리구리아인들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대의 주요 사료인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 역사> 중 두 사람의 집정관 재임기에 대한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어떻게 활약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이 연말에 로마로 개선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볼 때 승리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연말에 차기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여 형제 퀸투스가 이듬해 집정관에 선출되도록 했다. 기원전 170년 보이옽티아의 티스베 시에 대한 원로원 결의안에 가장 먼저 서명했으며, 기원전 169년 [[감찰관]]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는 기원전 133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또다른 아들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가문에 입양되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무키아누스로 개명하고 기원전 131년 집정관, 기원전 132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