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기원전 2세기 집정관]][[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2세기)] ||||<#800080> {{{#ffffff {{{+3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br]{{{-1 [[라틴어]]: Publius villius tappul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미상 || ||<#800080> {{{#ffffff '''지위''' }}} ||[[노빌레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정]] || ||<#800080> {{{#ffffff '''가족''' }}} ||티베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조부)[br]티베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아버지)[br]루키우스 빌리우스 파툴루스(형제)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199년 || ||<#800080> {{{#ffffff '''전임''' }}}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br][[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기원전 200년 집정관)|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800080> {{{#ffffff '''동기'''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br][[섹스투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카투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활약했다. == 생애 == 기원전 3세기부터 두각을 드러낸 [[노빌레스]] 가문인 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이 가문은 [[법무관]] 등 여러 고위직 행정관을 맡았지만 [[집정관]]만은 이르지 못했는데, 그가 이 가문의 유일한 집정관이 되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따르면, 조부와 아버지 모두 티베리우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형제로 기원전 199년 법무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있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04년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와 함께 평민 [[조영관]]을 맡았으며, 이듬해에 파이투스와 함께 법무관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시칠리아 총독을 맡았고, 시칠리아 함대 지휘권은 전임 총독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에게 맡겨졌다. 기원전 202년 그나이우스 테렌티우스 플라쿠스에게 총독직을 넘겨주고 마토를 대신해 함대를 이끌며 카르타고 함대의 습격으로부터 해안을 경비했다. 기원전 201년 전쟁이 끝난 뒤 로마로 귀환했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따라 아프리카 원정에 뛰어들었다가 귀환한 병사들에게 아풀리아와 삼니움의 토지를 분배하는 임무를 맡은 위원회의 일원을 역임했다. 기원전 199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기원전 199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제비뽑기를 통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지휘권을 맡았다. 전년도 집정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는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원로원은 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만큼의 새 군인을 모집하도록 허락했다. 그렇게 병력을 모집하느라 봄과 여름을 쓴 뒤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발칸 반도로 진군했다. 그러나 아폴로니아에 상륙한 직후 병사들의 봉기에 직면했다. 2,000명의 참전 용사들이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복무하며 [[한니발 바르카]]와 맞서 싸웠는데 또다시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전역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령에 다시 복종한다면 나중에 전역시켜주겠다고 약속해 가까스로 분란을 종식했다. 이러느라 시간을 허비했기에 군사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겨울 숙영지로 이동했고, 이듬해 봄 전임 집정관의 자격으로 원정을 개시했지만 험준한 산길을 틀어막은 필리포스 5세의 군대를 상대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신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발칸 반도에 상륙하여 지휘권을 양도받으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그가 그 전에 군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대패했다고 기술했지만,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타풀루스가 별다른 작전을 수행하지 않다가 플라미니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고 밝혔다. 그 후 플라미니누스 군대의 [[레가투스(로마)|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았고,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 참여한 뒤 필리포스 5세와 맺을 평화 조약을 고안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196년 사절로서 리시마키아로 파견되어 [[안티오코스 3세]]에게 그리스로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무시당했고, 기원전 193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안티오코스 3세를 재차 찾아가서 에페소스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재차 협상했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결국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기원전 192년 초 로마로 일시 귀국했다가 곧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그나이우스 세르비우스 카이피오,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와 함께 그리스로 가서 안티오코스에 대항하여 로마에 협력할 지원 세력을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