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로마 공화국 집정관]][[분류:기원전 3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출신 인물]] [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기원전 3세기)] ||<-2> {{{#ffffff {{{+3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 }}}[br]{{{-1 [[라틴어|{{{#white 라틴어}}}]]: Publius Cornelius Lentulus Caudinus }}} }}} || ||<#800080> {{{#ffffff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800080> {{{#ffffff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800080> {{{#ffffff '''지위''' }}} ||[[파트리키]] || ||<#800080> {{{#ffffff '''국가''' }}} ||[[로마 공화국]] || ||<#800080> {{{#ffffff '''가족'''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75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버지)[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형제)[br]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들)[br]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아들) || ||<#800080> {{{#ffffff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800080> {{{#ffffff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800080> {{{#ffffff '''임기''' }}} || 기원전 236년 || ||<#800080> {{{#ffffff '''전임''' }}}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br][[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800080> {{{#ffffff '''동기''' }}} ||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 || ||<#800080> {{{#ffffff '''후임''' }}} ||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br][[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 ||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생애 ==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75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기원전 275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피로스 1세]]의 [[에페이로스 왕국]]군에 맞서 싸웠다. 형제로 기원전 237년 집정관, 기원전 236년 [[감찰관]], 기원전 220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역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기원전 237년 집정관)|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가 있었다. 기원전 236년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바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북부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보이족이 [[알프스 산맥]] 너머 갈리아 부족들을 끌어들여 로마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두 집정관은 아르미눔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갈리아 연합군의 수가 워낙 많아서 한동안 전투를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후 보이족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보이족의 왕 2명이 살해당하는 등 격렬한 내전이 벌어지고 알프스 산맥 너머에서 온 부족들은 그들의 땅을 심하게 약탈하면서 연합이 무너지자, 두 사람은 굳이 공격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기로 했다. 바루스는 코르시카로, 그는 리구리아로 가서 지역 부족들을 성공적으로 무찌른 뒤 로마로 귀환하여 [[개선식]]을 거행했다. 로마의 퀴리날레 언덕에 있는 퀴리누스 신전에 바쳐진 비문 중에는 “P. Corn[elios] L. f. coso[l] proba[vit] Mar [te sacrom]"라고 적힌 비문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리구리아인들에 대한 승리를 거둔 뒤 이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이 비문을 바쳤을 것이라 추정한다. [[폴리비오스]]가 인용한 [[카일 아크테의 실레노스]]와 [[라케다이몬의 소시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9개월간 [[사군툼 공방전]]을 벌인 끝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우디누스는 카르타고에게 전쟁을 당장 선포하자고 주장했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먼저 정의 회복을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회의가 열릴 수 없다며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에게는 두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가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203년 [[법무관]]을 맡아 시칠리아를 다스렸고, 루키우스는 기원전 209년 수석 [[조영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