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예루살렘 왕국)]][[분류:샤랑트 출신 인물]] [목차] == 개요 == 풀크 당굴렘(Foulques d'Angoulême : ? ~ [[1157년]] 11월 20일)[* 푸세(Foucher) 라고도 한다.]은 1146년부터 1157년까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예루살렘 왕국)|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Fulk_of_Angoul%C3%AAme|앙굴렘 백작 풀크]]와는 다른 인물이다. == 생애 == 풀크는 [[앙굴렘]](Angoulême) 출신이다. [[기욤 드 티레]]에 따르면, 그는 "종교적이고 신을 두려워하며, 천박한 학문에 매료되었지만 신의있는 사람이자 규율을 사랑하는 자"였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풀크가 셀르프루앙(Cellefrouin)의 대 수도원장에 있을 때와 예루살렘으로 갈 때까지, 성좌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 2세]](Anacletus II)로 분열했다. 1131년 앙굴렘의 주교는 아나클레토 2세의 편에 섰고 풀크는 인노첸시오 2세에 섰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성묘 교회]]의 의전 사제로 일했고, 그리고 1134년에는 티레의 대주교이자 성묘 교회 수도원장이었던 기욤 1세(William I)의 후임이 되었다. 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기욤 드 말린]](Guillaume de Malines)에게 서임받지만, 인노첸시오 2세에게 팔리움[* 대주교 이상의 고위 사제가 사용하는 양털 띠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다. 견책이라고도 한다.]을 받기 위해 로마로 여행한다. 그런데 풀크가 귀환하자 총대주교 기욤은 그를 박대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 기욤에게 티레 대교구를 로마의 아래에 두거나 안티오크 라틴 총대주교 관할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1145년에 기욤 드 말린이 사망하자 이듬해에 후임 총대주교로 선출되었으며[* 티레 대주교좌는 예루살렘의 수상 랄프(Ralph)와 바르셀로나의 페드로(Peter of Barcelona) 사이의 분쟁 끝에 페드로가 계승했다.] 1149년에는 50여년간 재건된 [[성묘 교회]]를 축성했다. 1148년 풀크는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제2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환영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안티오키아에 들른 프랑스의 [[루이 7세]]를 만나기 위해 파견되어, 루이가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도록 설득했다. 1152년 풀크는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와 그의 어머니 멜리장드의 권력 분쟁에 개입했다. 이 분쟁은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풀크의 평화 협상 시도는 실패했으며, 보두앵이 승리했다. 1156년 풀크는 근친을 이유로 아모리 1세와 아녜스의 결혼을 반대했다. 풀크는 1157년 11월 20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