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7년 전쟁]] ||<-3><#C0C0FF><:> {{{+1 '''프라이베르크 전투[br]Schlacht bei Freiberg'''}}} || ||<:><#C0C0FF> '''시기''' ||<-2> 1762년 10월 29일 || ||<:><#C0C0FF> '''장소''' ||<-2>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Freiberg, 높이=224px, 너비=100%)]}}} [br] 프라이베르크 || ||<:><#C0C0FF> '''교전국''' || '''프로이센 왕국'''[br]{{{-2 (공격자)}}}[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blue; font-size: 1.2em" {{{#white '''승'''}}}}}} || '''오스트리아'''[br]{{{-2 (방어자)}}}[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3px; margin-right: 3px; background: red; font-size: 1.2em" {{{#white '''패'''}}}}}} || ||<:><#C0C0FF> '''지휘관''' ||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 '''스톨베르크''' || ||<#C0C0FF><:> '''병력''' || 22,657명 || 31,000명 || ||<#C0C0FF><:> '''피해''' || 사상자 : 1,400명 || 사상자 : 7,400명 || ||<:><#C0C0FF> '''결과''' ||<-2> '''프로이센의 승리''' || ||<:><#C0C0FF> '''영향''' ||<-2> '''[[7년 전쟁]]의 종료[br]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체결[*조약내용 7년 전쟁 발발 전으로 돌아간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1762년 10월 29일 [[작센]]의 [[프라이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이 전투를 끝으로 [[7년 전쟁]]이 막을 내린다. == 배경 == 7년 전쟁 말기 [[프로이센]]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120명의 장군, 1500명의 장교,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는 등 군사적 역량이 한계에 달해 가는 상황이었고,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할 것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1762년 1월에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사망하고 그녀의 조카인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를 숭배한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다닐 정도였으며, 즉위하자마자 프로이센과의 평화교섭에 나섰다. 결국 같은 해 3월, 5월에 휴전조약과 평화조약이 맺어지고 거기다가 스웨덴마저 휴전을 시키면서 프로이센 왕국은 기사회생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역시 대륙의 승리를 위해 프로이센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기로 하고 북아메리카 전선외에도 많은 병력과 지원을 하노버에 보냈다. 그 결과 1762년 6월 24일의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이기면서 프랑스는 전쟁 수행의지를 잃어가고 있었고 결국 전선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만이 프로이센군과 싸우게 된다. == 전개 ==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은 2진 부대와 비정규 대대로 구성된 2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과 맞서게 되었다. 10월 29일 하인리히 공은 소규모 병력으로 적 주력을 묶고 주력으로 좌측면을 치기로 했다. 이러한 측면 돌격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으로 기병대로 오스트리아 군 전선 중앙에 대한 대규모 돌격을 단행, 오스트리아 군을 철저히 분단시킨 프로이센 군은 대대적인 총공격으로 결국 승리하게 된다. == 결과 == 전투에서 패한 오스트리아군은 피르나로 퇴각했고, 프로이센군은 그런 적을 추격하여 11월에 나움베르크, 뷔르츠부르크, 레겐스부르크를 공략했다. 이렇듯 아군이 속절없이 밀리고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 본토까지 노리게 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1763년 2월 15일 라이프치히 교외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프로이센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서 장장 7년간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