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05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뮌헨 출신 인물]]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치라이스1.jpg|width=100%]]}}}|||| ||<#666> {{{#FFF 이름}}} ||<(>'''Franz Xaver Ziereis'''[br] 프란츠 크사버 치라이스|| ||<#666> {{{#FFF 출생}}} ||<(>[[1905년]] [[8월 13일]], [[독일 제국]] 뮌헨 || ||<#666> {{{#FFF 사망}}} ||<(>[[1945년]] [[5월 24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마우트하우젠 || ||<#666> {{{#FFF 복무}}} ||<(>[[국가방위군]] (1924년 ~ 1936년) [br] [[슈츠슈타펠]] (1936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대령]] (연대지도자)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프란츠 치라이스.jpg|width=100%]] ||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 [[대령]],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소장 == 초기 행적 == [[뮌헨]]에서 태어난 치라이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마차 운전수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버지를 두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백화점의 견습 광고사원으로 일한 그는 [[1922년]]부터 목수일을 하다 [[1924년]]에 [[국가방위군|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입대했다. 여기에서 12년 가까이 복무하면서 중사까지 승진했지만 [[1936년]] [[9월 30일]]에 제대당했다. == [[슈츠슈타펠]]에서의 행적 == 그러나 얼마 후 강제수용소의 유지를 위해 친위대 해골부대에 친위대 중위로 소집된 그는 해골부대원의 트레이너 코치로 근무했다. [[1937년]]에 해골부대의 백인부대 대장이 되었던 치라이스는 훈련도중 부상을 입어 입원했지만 [[1938년]]부터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근무에 나서 젊은 해골부대원들을 교육했다.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장 == || [[파일:치라이스2.jpg|width=100%]] ||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의 프란츠 치라이스[* 가운데의 인물이 치라이스이다.] || [[1939년]] [[2월 9일]]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 취임한 치라이스는 독일이 패전하기 전까지 소장자리를 유지했다. [[1941년]] [[4월]]에 [[하인리히 힘러]]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수용소의 시찰을 위해 방문하자 스스로 안내역을 자청하기도 한 치라이스는 이들과 나란히 사진을 찍으며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마우트하우젠 치라이스 힘러.jpg|width=100%]]}}} || ||<#ddd>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를 방문한 친위대 장군들과 프란츠 치라이스[* 왼쪽부터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치라이스,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하인리히 힘러]], [[카를 볼프]], [[프란츠 쿠체라]]이다.] || == 전후 행적 == 전후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가 미군에 의해 해방되자 치라이스는 아내와 자식을 대동하고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필른 산맥으로 달아났지만 [[1945년]] [[5월 23일]]에 발견되었다. 도주하려던 치라이스는 미군의 발포에 의해 총상을 입고는 구젠의 미군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시체는 풀려난 수용소 포로들에 의해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부근의 다른 수용소인 구젠 수용소의 펜스에 매달려 더욱 비참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동맹국의 수장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비슷한 최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