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rgba(50%, 50%, 50%, 30%) 0%, transparent)" {{{+1 {{{#000000,#e5e5e5 ''' 체코의 前 축구선수 '''}}}}}}}}}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blog.hu/Planicka.jpg|width=100%]]}}} || ||<-2> {{{#000000,#e5e5e5 '''이름'''}}} || '''{{{+1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 [br] František Plánička''' || ||<-2> {{{#000000,#e5e5e5 '''출생'''}}} ||[[1904년]] [[6월 2일]] [br]{{{-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 지슈코프지구}}} || ||<-2> {{{#000000,#e5e5e5 '''사망'''}}} ||[[1996년]] [[7월 20일]] (향년 92세) [br]{{{-1 [[체코]] [[프라하]]}}} || ||<-2> {{{#000000,#e5e5e5 '''국적'''}}} ||[[체코]] [[파일:체코 국기.svg|width=28]] || ||<-2> {{{#000000,#e5e5e5 '''신체'''}}} ||[[키(신체)|키]] 172cm | [[체중]] 68kg || ||<-2> {{{#000000,#e5e5e5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 || {{{#000000,#e5e5e5 ''' 소속 ''' }}} || {{{#000000,#e5e5e5 ''' 선수 ''' }}} ||'''[[SK 슬라비아 프라하]] (1923~1939)''' || ||<-2> {{{#000000,#e5e5e5 '''국가대표'''}}} ||73경기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 / 1926~1938)^^ || ||<-3> '''정보 더 보기'''[br]{{{#!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000000,#e5e5e5 ''' 별명 ''' }}} ||[[프라하]]의 [[고양이]]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체코]]의 前 축구선수. [[SK 슬라비아 프라하]]에서만 뛴 [[원 클럽 플레이어|원클럽맨]]이다.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선수 생활 === ==== 클럽 ==== [[프라하]]에서 태어난 플라니치카는 어렸을 때 여러 클럽을 전전했고 성인팀 데뷔 직전 무렵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팀이던 [[AC 스파르타 프라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스파르타 수뇌부에선 [[주세페 메아차|플라니치카가]] [[호세 마누엘 모레노|키가 작다는 이유로]] [[프랑코 바레시|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세부터 고향 프라하를 연고로 하는 팀들 중 명문 클럽이자 스파르타의 라이벌인 [[SK 슬라비아 프라하]]에 정착했다. 이 정착 과정도 복잡했는데 원래 슬라비아 프라하 입단 직전에 플라니치카는 SK 부베네치(Bubeneč) 소속이었지만 부베네치의 허락 없이 슬라비아 프라하의 리저브 팀 훈련에 참가했고 시합에까지 참가했다. 결국 가명을 쓰면서까지 슬라비아 프라하의 경기에 출전하던 플라니치카는 이 일로 300 [[체코슬로바키아 코루나|코루나]]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슬라비아 프라하는 결국 플라니치카를 800 코루나의 이적료를 주고 부베니치에서 데려왔다. 지금에서야 슬라비아 프라하는 방황을 멈추고 [[1. 체스카 폿발로바 리가|체코 리그]]를 다시 주름잡고 있지만 30년대에는 플라니치카,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 역대 최다 득점자 [[안토닌 푸치]] 등을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지금보다 더 강한 맹주로 군림했었다. 플라니치카는 [[원 클럽 플레이어|이 클럽에서만 16년을 뛰면서]] 골문을 든든히 지켰고 슬라비아 프라하는 그의 활약에 힘입어 3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1부리그|체코슬로바키아 리그]] 최강팀으로 역사에 남았다. 슬라비아 프라하의 위세는 체코슬로바키아 밖에서도 대단했는데 1932년 미트로파 컵에서 당시 [[세리에 A|이탈리아]] 최강팀 [[유벤투스 FC]]를 만나 유벤투스를 4대0으로 꺾어버린 적도 있었다.[* 당시 유벤투스는 제1차 전성기를 맞이하던 팀으로 세리에 A [[연속우승|5연패]](경기 당시에는 3연패)의 업적을 쌓았고 유벤투스 선수들이 주축이 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대표팀]]은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2년 뒤에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우승시켰다.] 하지만 이는 슬라비아 프라하, 유벤투스 모두에게 [[흑역사]]인데 초반에 2골을 먼저 넣은 슬라비아 프라하는 훼방과 [[침대축구|시간 끌기]]로 남은 시간을 보내버렸다. 이에 화가 난 유벤투스 팬들은 [[돌멩이|돌]]과 [[쓰레기]]를 슬라비아 프라하 선수들에게 투척했고, 이 과정에서 골키퍼 플라니치카가 유벤투스 팬들이 던진 물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슬라비아 프라하는 2차전을 포기했고, 주최측에서는 이 일에 책임을 물어서 두 팀을 모두 탈락시켜버리고 말았다. 그는 슬라비아 프라하에서 16년간 거의 천 경기 가까이 뛰었고 그 과정에서 73%의 승률을 올리면서 리그 우승만 8회를 차지했다. 그리고 아쉬움이 남았던 미트로파 컵 우승도 1938년에 마침내 달성했다. ==== [[체코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 플라니치카는 1926년부터 국가대표 생활을 했는데 그의 첫 대표팀 경기는 1926년 1월 17일의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이탈리아에 1대3으로 패했다. 그 이후 플라니치카는 12년의 국가대표팀 생활 동안 무려 73경기를 뛰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그보다 [[A매치]]를 더 많이 뛴 선수는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의 수비수 [[세베리노 미넬리]]밖에 없다. 그리고 [[라디슬라프 노바크]]에 의해 그의 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이 깨지는 데에는 28년이 걸렸다.] 또한 그는 그가 대표팀에서 뛴 73경기 중 37경기를 주장으로서 참가한 1930년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의 간판이자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었다.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년 월드컵]] ===== 체코슬로바키아 대표팀의 주장으로 월드컵에 참가한 플라니치카는 매 경기마다 실점은 있었지만 인상적인 방어를 선보이며 팀을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s-4.1|결승]]에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결승전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의 [[잔피에로 콤비]]와의 골키퍼 대전. 이 혈투에서 플라니치카는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뛰던 이탈리아 선수들의 투지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2골 다 플라니치카조차 막을 수 없는 훌륭한 골들이었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s-1.8|1라운드]]에서 연장에만 3골을 넣어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를 따돌린 체코슬로바키아의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s-1.2|다음 상대]]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이었다. [[보르도]]에서 만난 두 팀은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난투극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플라니치카는 어떻게 경기는 마쳤지만 경기 중에 오른팔이 부러져 재경기를 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브라질에게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이후#s-1.5|재경기]]에서 패배하여 8강에서 짐을 쌌고, 그것이 플라니치카의 마지막 A매치가 되었다. 팀 성적은 아쉬웠지만 240분간의 경기에서 단 한골만을 허용한 플라니치카에게[* 출전 시간 대비 실점률로 따지면 당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우승팀]]의 골키퍼 [[알도 올리비에리]]보다 더 좋았다.] 그 대회에서 베스트 골키퍼의 영광이 돌아온 것은 그나마 그에게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 은퇴 이후 === 은퇴 후에도 금욕적인 생활과 함께 축구를 즐기며 건강관리를 잘해서인지 꽤나 오랫동안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 1996년, 자신의 친정팀 [[SK 슬라비아 프라하]]가 48년만에 [[1. 체스카 폿발로바 리가|체코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91세의 노구를 이끌고 축하연에 참석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달 후 플라니치카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식]]에 대표팀의 먼 후배였던 [[카렐 포보르스키]]도 참석했는데 그는 원래 그 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입단 계약일이었지만 입단 계약을 미루고 플라니치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화제가 되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172cm의 작은 키였지만 빠른 반사신경을 통한 뛰어난 슈팅 방어 능력을 갖고 있었고 아크로바틱한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별명이 [[프라하]]의 [[고양이]]였다.[* 요즘은 골키퍼들에게 고양이라는 별명이 잘 안 붙지만 옛날에는 반사신경이 좋은 골키퍼들에게 흔히 고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플라니치카 외에도 마라카낭의 고양이 [[안토니 라마예츠]], 안칭의 고양이 [[제프 마이어]]가 그 예이다.] 그러면서 용기와 대단한 근성, 신사적인 매너 또한 가지고 있었다. 후대의 선수와 비교하면 [[이케르 카시야스]]와 비슷할 듯 싶다. [[루저의 난|골키퍼 치고는 작은 키]], 왼발잡이,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에서 주장으로서의 리더십, 아크로바틱한 세이브 그리고 관중의 물건투척 사건까지.. 그리고 [[이보 빅토르]], [[페트르 체흐]]와 체코의 역대 골키퍼들 중 탑을 다투는 선수이기도 하다. == 수상 == === 클럽[* 플라니치카는 [[SK 슬라비아 프라하]]의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 * [[체코슬로바키아 1부리그]] 우승 8회: 1925, 1928–29, 1929–30, 1930–31, 1932–33, 1933–34, 1934–35, 1936–37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8 * 보헤미안 컵 우승 6회: 1926, 1927, 1928, 1930, 1932, 1935 === 국가대표 === * [[FIFA 월드컵]] 준우승 1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 개인 === * [[FIFA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 * [[유네스코]] 국제 페어플레이 상: 1985 * 체코 페어플레이 상: 1994 [각주] [[분류:1904년 출생]][[분류:1996년 사망]][[분류:체코슬로바키아의 축구선수]][[분류:골키퍼]][[분류:SK 슬라비아 프라하/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분류:체코슬로바키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분류:프라하 출신 인물]][[분류:1923년 데뷔]][[분류:1939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