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사건사고)] [include(틀:북한의 쿠데타 및 반란)] [목차] == 개요 == [[1992년]]에 [[북한]]에서 벌어졌던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유학생들의 [[쿠데타]] 모의 사건.[[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co-su-11242015091343.html|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의 쿠데타 모의 사건]] == 과정 == === 배경 === [[냉전]] 시절 [[북한]]은 [[공산권]]의 지도국가 [[소련]]에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북한에서도 상위계층 출신이었고 [[김일성]]의 [[관심]]도 남달라서 거액의 [[장학금]]을 받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한편 소련도 북한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북한 유학생들을 상당히 우대하였고 이 중에서 일부는 [[KGB]]가 연일 [[백인]] 미녀들과 술을 대 주면서 자신들의 정보원으로 포섭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소련 유학생들은 이런 양쪽의 지원에 힘입어서 상당히 여유로운 [[생활]]을 했고 수완이 좋은 일부는 장사에도 손을 대서 꽤 많은 [[돈]]을 만졌다고 한다. KGB에 포섭된 소련 유학생들은 현지 [[정보기관]]과 결탁해 북한 내부 정보를 유출했고 [[소련]]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생기면 이들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단계별로 돈을 지불했고 이를 거부하면 낙제생으로 만들고 테러 조직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재판정에 세웠다. 한편 소련에서 유복한 삶을 살던 [[엘리트]] 유학파 [[장교]]들은 북한에 돌아와 매우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되었고[* 소련과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였지만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소련은 사회주의 독재 체제가 아무리 극에 달해도 북한급으로 폐쇄적이지는 않았고 암암리에 서방제 물품들이 들어올 정도였지만 북한은 1970년대부터 이미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어]]로만 대화하는 등 소련 유학파 출신들이 모이는 일종의 [[이너 서클]]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1950~[[1960년대]] 소련에서 유학했던 1세대 유학파들부터 20대 젊은 층까지 있었다고 한다. [[1991년]]에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사회주의]] 체제에서 유례없는 권력 세습에 크게 반발한 이들은 쿠데타를 준비했는데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한국군 vs 북한군|남한을 침공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물론 [[고난의 행군]]이 있었던 90년대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예상 가능한 결과는 당연히 북한의 멸망밖에 없다. 대외적 여건을 봐도 이미 동유럽 공산 정권은 무너진 지 오래였으며 소련마저도 1991년 12월 [[소련 붕괴|붕괴]]됐다. 중국도 1992년 한중수교를 앞둔 시점이었으므로 대한민국을 굳이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 시도 ===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 모의는 [[최룡해]]의 [[매부]]였던 홍계성이 이끌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홍계성에게 [[1992년]]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김정일]]이 직접 [[상장(계급)|상장]]의 [[견장]]([[계급장]])을 달아 주었다. 홍계성과 함께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도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었고 여기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프룬제 군사대학]]에 유학한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도 합세했다. 그들은 [[조선인민군]] 창군 60주년이 되던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탱크]]로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프룬제 유학파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부대도 쿠데타 계획에 합류했다.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유학파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평양방어사령부]] 탱크사단 소속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북한)|박기서]]가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대신 [[인민무력부]] 직할부대의 탱크가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기 쿠데타 계획은 실패했다. === 진압 === [[러시아]]는 [[소련]]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했다. 첫 쿠데타 음모가 실패하자 기존 [[KGB]]의 한 [[간부]]였던 [[사람]]이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고발했다. [[김정일]]은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분노하면서 [[조선인민군]]의 [[방첩기관]]인 [[보위국|인민군 보위국]][* [[남한]]으로 치면 [[군부독재]] 정권 시절 [[국군보안사령부]] 정도에 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와는 다른 기관이다.]에 이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에서 중대회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이 도착하자 인민군 보위국 국장 [[원응희]]가 지휘하는 작전조를 투입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총참모장]] [[최광]]과 [[보위국|보위국장]] [[원응희]]가 주최한 이날 회의에서 [[최룡해]]의 매부였던 인민군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장령급 지휘관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5년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각 [[군단]], [[사단]], [[여단]]의 모든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고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도 [[1997년]]에 체포되었으며 [[1993년]] 말 김책공군대학에서 재직하던 유학생 17명은 [[평양역]] 부근에서 크게 저항해 인민군 보위국 1개 [[중대]]가 동원되어 겨우 제압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국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검열했는데 [[1998년]] [[량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 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처형]]하거나 비공개로 살해했다. 당시 량강도 보안국 리성훈 수사처장은 망치로 살해당했다. === 이후 === [[조선인민군]] 보위국은 이 사건과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고 [[군부]] 내의 반김정일 세력을 뿌리뽑은 공로로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었으며 보위국장이었던 [[원응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계급)|대장]]으로 진급했다.[* 북한군에는 [[중장]] 다음이 [[대장(계급)|대장]]이 아니라 상장이라는 계급이다. 마찬가지로 상장 다음이 [[대장(계급)|대장]]. 따라서 중장이 대장이 되었다는 것은 북한군에게는 두 [[계급]]이 오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장성급 장교|장령]] 30여 명과 [[좌관급 장교|좌급 군관]] 100여 명, [[위관급 장교|위급 군관]] 70여 명 등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 출신 도합 200여 명이 [[총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일부 유학생들은 [[군복]]을 벗은 채 지금도 북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은 [[외국]]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다. == 여담 == * [[2011년]] 초에 프룬제 출신 [[장교]] 한 명이 [[유학]] 당시 2000[[미국 달러|달러]]를 받은 사실을 숨겨 오다가 결국 [[자살]]을 택했는데 북한 핵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진 [[도상록]]의 [[친척]]이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개방·개혁 의식을 가진 군 장교들은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고 한다.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과 [[김영춘(1936)|김영춘]] 인민무력부장도 프룬제 출신이지만 전혀 다른 노선으로 [[김정일]] 일가에 충성하여 살아남았다. * [[2020년]] [[9월]] [[주성하]] 기자는 프룬제 쿠데타설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유튜브]] 채널로 밝혔다([[https://www.youtube.com/watch?v=RWiGjNvaDAQ|영상]]).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소련 붕괴]] 후 북한으로 모두 소환된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터트렸는데 소련으로 유학을 갈 수 있을 만큼 고위층 출신들이라 불만을 공공연하게 표출했고 이에 김정일이 이들을 [[숙청]]한 것이라고 한다. 즉 구체적인 실행의도나 계획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감시체제가 철저한 북한에서 이들이 자기들끼리 술자리를 갖고 거기에서 대놓고 처우나 [[세습]]문제 등을 비판하며 불만을 터트림을 보고받고 김정일이 미리 싹을 자른 것이다. 이후 여론이 안 좋아지자 [[토사구팽|김정일의 숙청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던 이봉원 대장을 남쪽의 간첩이라며 처형했다고 한다.]] 일단 여러 증언을 보면 쿠데타의 유무를 떠나서 이 시점에서 러시아 유학파 장교들을 보위부에서 연일 잡아서 죽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보위부 운전병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구대명도 자신이 프룬제 유학파 장교들을 실어나른 것을 기억했다. * [[소련 공산당]]이 붕괴되고 [[러시아]]에서도 [[자본주의]] 러시아 연방 정부가 들어서면서 [[프룬제 군사대학]]은 러시아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로 변경되었고 외국군 위탁교육을 동맹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확대했는데 현재는 북한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 장교들이 [[교육]]을 받는다. 만점 사례가 종종 나오므로 우수하게 인정받는 듯하다.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130710/5/BBSMSTR_000000010025/view.do|방공 분야 만점 졸업 사례 1]],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191114/14/BBSMSTR_000000010023/view.do|사례 2]], [[https://www.nocutnews.co.kr/news/4862632|잠수함 분야 최우수 졸업 사례]] == 관련 문서 == * [[북한 강경파]] - 사실상 전쟁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했으니 강경파라고 볼 수 있다. * [[쿠데타]] * [[조선인민군]] [[분류:1992년/사건사고]][[분류:김일성 시대]][[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북한의 사건 사고]][[분류:북러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