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센고쿠 시대/인물]][[분류:1514년 출생]][[분류:1580년 사망]][[분류:오다 가문 가신]][[분류:키타나고야시 출신 인물]] [목차] == 개요 == 林秀貞 (1514 ~ 1580) 오다 가문의 가신으로 오랫동안 미치카츠(通勝)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히데사다(秀貞)였다는 설이 정설이 되었다. [[오다 노부히데]]를 섬기면서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자 그 후견인으로써 가로에 임명되었으며, 1546년에 후루와타리 성에서 노부나가의 성인식 때 노부나가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았다. 노부히데가 사망하면서 노부나가가 당주가 되었는데, 1554년에 이마가와 군이 서쪽의 미카와로 진군하자 노부나가가 오와리의 방어를 위해 요격할 때 출진을 거부했다. 1555년에 노부나가가 [[오다 노부토모]]를 살해하면서 키요스성을 점령하자 나고야 성의 루수이에 임명되었지만 1556년에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오다 노부카츠]]를 옹립하여 반기를 들었고 이노 전투에서 패하자 노부나가에게 항복한다. 1560년에는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574년에 이세나가시마 [[잇코잇키]] 섬멸전에서는 포위할 배를 만드는 등 해상에서 후방 지원을 하였다. 1578년에 하리마 국 공략전과 칸키 성 공략전 등에도 참전하였다. 칸키 성 공략전에서는 [[오다 노부타다]]의 군단에 속하여 참전하였으며, 산요도 경비를 맡았다. 1580년에 노부카츠를 옹립하여 반기를 들었던 일을 이유로 추방된다. 추방 후 2개월만에 사망했다. 하야시 히데사다의 3남 하야시 카즈요시(林 一吉)는 아버지 히데사다가 추방될때 함께 추방 되었다가, [[혼노지의 변]] 이후에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가신이 되었다. 이때 카즈토요와 카즈요시 두사람은 "서로 먼저 영주가 되는 사람을 섬기자"라고 약속을 했다라는 일화가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후 논공행상에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토사1국을 받자 카즈요시는 가로(家老)의 직위와 야마우치 성(姓), 그리고 5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이후에도 카즈요시 가문은 대대로 토사번의 가로직을 역임했다..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8c066d09.jpg]]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c급 무장 정도로 나오지만 오다가를 오랫동안 모셔온 가신이라 노부유키의 반란이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컴퓨터에게 맡겨도 중간에 쫓아내질 정도로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