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이스라엘 대통령)]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CECEC, #FFF 20%, #FFF 80%, #ECECEC)" '''[[이스라엘 대통령|{{{#005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br]{{{#005 {{{+1 하임 바이츠만}}}[br]חיים־עזריאל ויצמן|Chaim Azriel Weizman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jpost.com/Weizmann.jpg|width=100%]]}}} || ||<|2> '''출생''' ||[[1874년]] [[11월 27일]] || ||[[러시아 제국]] 모탈[* 현 [[벨로루시]] 모탈]|| || '''사망''' ||[[1952년]] [[11월 9일]] (향년 77세) || ||<|2> '''재임기간''' ||초대 이스라엘 공화국 대통령|| ||[[1949년]] [[2월 17일]] ~ [[1952년]] [[11월 9일]] || || '''학력''' ||[[다름슈타트]] 공과대학교[br][[베를린 공과대학교]][br][[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 '''종교''' ||[[무종교]]([[무신론]])[* 바이히만의 종교는 [[유대교]]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재로는 [[무신론자]]였다.[[https://blogs.lse.ac.uk/religionglobalsociety/2018/05/the-sacred-for-the-profane-how-religion-challenged-secular-politics-in-israel-palestine/|#]]]|| [목차] [clearfix] == 개요 == >독립은 결코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쟁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쟁취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기적이란 때때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매우 큰 노력을 요구한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정치인, 화학자. 초대 수상 [[다비드 벤구리온]]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 건국을 주도한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 벤구리온이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유태인들의 단합을 주도하면서 건국 후의 초기 정부 지도자로 활동했다면, 바이츠만은 건국 이전 국제 무대에서 유대 국가의 재건을 위한 외교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 생애 == === 초기 생애 === 1874년 당시 [[러시아 제국]] 영토의 일부였던 모탈(현재 [[벨라루스]] 영토)에서 출생했다. 1892년 독일로 유학했고, 5년 후인 1897년 스위스로 다시 옮겨 2년만에 화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01년부터는 스위스에서 교편을 잡다가, 1904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로 옮겨 교수로 활동했다. === 아세톤 제조법을 개발한 화학자 === [[파일:external/the100.ru/chaim-weizmann-jew-849.jpg]]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두 사람은 같은 과학자이자, 유태인으로서도 상당한 교분이 있는 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건국 당시, 바이츠만과 더불어 대통령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본인의 나이가 너무 많다면서 사양했다.바이츠만이 나이가 더 많지만.]) 1910년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에서 설탕을 이용한 인조고무 제조 실험을 하던 중 [[아세톤]]의 제조 방법을 우연히 발견했다.[* 이 때문에 바이츠만은 화학계 연구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그의 연구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4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세톤이 군사적 가치(무연화약 생산)가 있음을 주목한 영국 정부에 의해 아세톤의 대량 생산에 공헌했다. 아세톤의 성공은 바이츠만이 영국에 대해 정치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8995804&memberNo=30120665|#]] ===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 === 이미 1901년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바이츠만은[* 4년 전인 1897년 [[테오도르 헤르츨]] 등이 주도했던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아세톤 개발에의 공헌을 통해 얻은 정치적 발언권을 유태 국가 재건에 적극 활용하려 했다. 그는 영국 외무대신 [[아서 밸푸어]]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유태인 국가의 재건'을 영국이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물로 밸푸어는 1917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데 협조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이다.[* 해당 서한은 바이츠만이 아닌, 당시 영국 내에서 유태인들의 대변자로 간주되었던 [[로스차일드]] 일가에게 전달되었다.] === 건국 이후 === [[http://www.ifcj.org/assets/images/blog-images/ChaimWeizmannOath021749750x375.jpg]] 우여곡절 끝에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바이츠만은 그해 5월부터 9개월 동안 벤구리온의 뒤를 이어 임시정부격인 임시국가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에 성립된 내각제 형태의 첫 이스라엘 정부에서 실질적 지도자인 총리로 [[다비드 벤구리온]]이 선출되었고, 바이츠만은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70대의 고령으로 접어들었던 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1952년에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에 타계했다. 향년 77세. 유해는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레호르트에 안장되었다. 이곳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바이츠만 과학 연구소'가 세워져 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인 1934년에 설립되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3명이나 배출하기도 한 명문 연구기관이다.] == 기타 == [[파일:external/2781710a918e7c1453c2ae3060737b5dbf74db6bbf0233e09196bcb06d6e5c8c.jpg]] * 1970년대 이스라엘 화폐에 그의 초상이 쓰이기도 했다. [[파일:external/k45.kn3.net/15B954424.jpg]] * 영화배우 [[벤 킹슬리]]가 그와 닮았다는 평이다. 킹슬리 본인은 유태인이 아니지만, 외증조부가 러시아계 유태인으로, 킹슬리는 유태인을 직접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에도 출연한 바 있다. 한편으로는 [[아돌프 아이히만]] 체포작전을 다룬 [[오퍼레이션 피날레]]에서 아이히만을 연기하기도 했다. * 동생인 농업경제학자 예켈 바이츠만의 아들 [[에제르 바이츠만]]은 영국군과 이스라엘군에서 복무한 뒤 소장으로 전역하고 국방장관과 대통령을 역임했다. [[분류:이스라엘 대통령]][[분류:이스라엘의 독립운동가]][[분류:이스라엘의 화학자]][[분류:학자 출신 정치인]][[분류:1874년 출생]][[분류:1952년 사망]][[분류:건국자]][[분류:화폐의 인물]][[분류:브레스트 주 출신 인물]][[분류:러시아계 유대인]][[분류:벨라루스계 유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