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몰년 미상]][[분류:조선의 아전]] 河自溶 ? ~ ? [목차] == 개요 == [[임진왜란]] 시기의 [[아전]]. [[징비록]]에 등장하며, 경상우병영의 영리(營吏)였다. == 상세 == 1592년([[선조(조선)|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1590년 [[조선통신사]] 부사(副使)로 [[왜국]]에 파견되었을 때 '왜적들이 쉽사리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해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나랏일을 그르치게 했다는 이유로 당시 [[경상도|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김성일(조선)|김성일]]을 파직하였고, [[의금부]] 도사(都事:종5품)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한성부]]로 소환하여 하옥시키려 했다. 이때 김성일은 사방으로 흩어진 군사를 소집하고, 경상우도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수습할 계책을 세우려고 했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경상도|경상우도]] [[관찰사]](종2품) [[김수]]가 김성일이 잡혀간다는 말을 듣고 길에 나아가서 작별하였는데, 김성일은 자신이 붙잡혀 소환되어 가는 일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은 채, 오직 김수에게 있는 힘을 다하여 왜적들을 토멸하라고 격려하였다. 이것을 본 늙은 영리(營吏) 하자용(河自溶)이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자기가 죽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오직 나랏일만 근심하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였다. 이후 김성일은 가다가 [[충청도]] [[천안시|직산현]]에 이르렀을 때, [[류성룡]] 등의 계속된 변호에 힘입어 김성일이 경상도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것을 알게 된 [[선조(조선)|선조]]는 노여움은 가까스로 풀었다. 이에 김성일의 죄를 용서한 다음,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삼아 경상우도 도내의 인민을 효유해서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였다.[[http://hakbong.org/hb/?mid=page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