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법부대신)]||<-2> '''[[대한제국 총리|{{{#ffde09 대한제국 참정대신}}}]][br]{{{+1 한규설}}}[br]韓圭卨 | Han Kyu-seol''' || ||<-2> {{{#!wiki style="margin: -8px -10px" [[파일:1611332825188.png|width=100%]][br]{{{#!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korea-pm-1905.jpg|width=100%]]}}}}}} || || '''이름''' ||한규설(韓圭卨) || || '''자 / 호''' ||순우(舜佑) / 강석(江石) || || '''본관''' ||[[청주 한씨]][* 안양공파 29세 규(圭) 항렬.] || ||<|2> '''출생''' ||[[1848년]] ([[헌종(조선)|헌종]] 14) [[2월 29일]] ||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 ||<|3> '''사망''' ||[[1930년]] [[9월 22일]](향년 82세) || ||[[충청북도]] [[청주시|청주군]] 사택 별저 || ||[[병사]] || || '''직업''' ||[[관료]], [[무관]] || || '''종교''' ||[[유교]](성리학) || || '''주요 경력''' ||[[형조판서]][br][[한성판윤]][br][[법부]] 대신[br][[내각(대한제국)|의정부]] 찬정[br]의정부 참정대신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말기의 무신(武臣)이자 [[을사조약]] 당시 참정대신(현재의 부총리, 그러나 당시에는 의정대신이 공석이라 실질적으로는 국무총리 서리에 가까운 기능을 하고 있었다.)을 지냈던 인물.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이다. 1905년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 강요 당시에 탁지대신(현재의 기재부장관) [[이용익]]과 함께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둘뿐인 인물 중 한명이다. [[갑신정변]] 당시에 살해당한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한규직(韓圭稷)의 동생이다.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09110819522610001010-001.jpg|width=100%]]}}} || 한규설은 1848년 2월 29일 [[한성부]] 남부 대평방(현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장교동]])[[http://travel.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6/07/2012060701537.html|#]]에서 부사(府使)를 지낸 아버지 한승렬(韓承烈, 1817 ~ 1860. 9. 26)과 어머니 [[해주 오씨]](1814 ~ 1904. 4. 4)[* 오치현(吳致賢)의 딸이다.]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한원식(韓元植, 1790 ~ 1866. 8. 27)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한원식은 한규설의 친조부이다. 한원식의 형 한의식(韓義植, 1786 ~ 1839. 6. 16)에게 아들이 없어서 한원식의 독자 한승렬이 한의식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한원식의 제사를 받들 이가 없어서 한승렬의 차남인 한규설이 도로 한원식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1876년([[고종(대한제국)|고종]] 13) 증광 [[무과]]에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UV_6JOc_9999_034116|급제하여]] 형조판서, 한성판윤, 포도대장을 지내다가 [[1905년]]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대신[* 의정대신의 다음 직위로 부총리에 해당.]이 되었다. 그 해 [[을사조약]] 체결 당일 어전회의 직후 대신 8인과 하야시 일본 공사,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모인 회의장에서 조약에 반대의견을 피력한 이후 회의 도중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엄귀비의 거처에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졸도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참정대신의 자리에서 파면된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11017_002|고종실록, 고종 42년 11월 17일]]][* [[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12016_003|고종실록, 고종 42년 12월 16일]]]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작위를 거절 혹은 박탈당한 인구는 그 많은 작위 수혜자 중에서 불과 8명이다. [[1920년]]에는 월남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설하여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 대중매체에서 == * 1959년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 배우 송억이 맡았다. * 1972년 영화 <[[의사 안중근]]>에서 배우 [[최남현]]이 맡았다. * 1980년 MBC 8.15 특집극 <의친왕>에서 배우 [[한인수]]가 맡았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선 배우 김봉근이 맡았는데,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백인철이 맡았다. * 1990년 KBS1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이대로가 맡았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김호영이 맡았다. * 1996년 연극 <제국의 광대들>에선 배우 강계식이 맡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팔순 기념작이다. == 기타 == [[장지연]]은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에서 '''한규설 이 놈도 을사늑약을 못 막은 주제에 무슨 낯으로 살아 숨쉬는가?'''라며 폭풍같이 깠다.[* 원문은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국민)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한규설)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상헌(조선)|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폐하(고종)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정작 장지연 자신은 경술국치 이후 말년에 자포자기하여 변절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한규설이 살던 한옥은 [[국민대학교]]에서 구입, 해체하여 정릉 소재지로 옮겨 짓고 학생들의 예절 교육관으로 쓰고 있다. 외부 손님의 교내 탐방 코스, [[다도]] 수업 등에 쓴다. 원래 99칸의 큰 집이었다고 하나, 국민대학교의 위치가 산 중턱이라 일부만 옮겨 놓았다. 한규설의 아들 한양호는 당시 경성 서대문 무악재 위의 인왕산 자락에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설립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문영여자고등학교]], [[서울문영여자중학교]]의 전신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법부대신)] [include(틀:조선귀족)] [[분류:조선의 무관]][[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청주 한씨 안양공파]][[분류:중구(서울) 출신 인물]][[분류:1848년 출생]][[분류:1930년 사망]][[분류:수구파]][[분류:조선귀족 작위 거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