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한복(1914).jpg]] || || '''성명''' ||한복([[韓]][[宓]]) || || '''본관''' ||[[청주 한씨]] || || '''출생''' ||1914년 9월 16일 || || '''사망''' ||1994년 1월 15일 || || '''학력''' ||[[무사시대학|무사시고등학교]][br][[도쿄제국대학]] 법학부 || || '''경력''' ||경성지방법원 판사[br]경상남도 산업과장[br]한국법률구조협회 회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의 판사, 관료, [[대한민국]]의 변호사. == 생애, 활동 == 1914년 9월 16일 [[경성부]]에서 [[한석명]]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자매 소설가 [[한무숙]], [[한말숙]]의 오빠이다. 큰아버지 한길명[*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때 [[이준(열사)|이준]] 열사의 보좌관을 지냈다.]에게 입양되었다. 1932년 부산중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 1935년 무사시고등학교(현 [[무사시대학]]의 전신)[* 당시는 중등교육기관이 아니라 고등교육기관이다. [[구제고등학교]] 참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5년 [[도쿄제국대학]]에 들어가, 1938년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고, 재학 중이던 1937년에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사법관시보 및 예비판사를 거쳐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부산지방법원, 경성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했고, 1944년 고등관 5등 이사관으로 전임하여 광복 시까지 평안남도 산업부 산업과장으로 재직했다. [[8.15 광복]]을 맞아 월남하여 1946년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한국법률구조협회 회장, 국제법률구조협회 한국지역 대표이사, 한국[[수렵|엽도(獵道)]]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4년 1월 15일 사망했다. 부인 이병오(李丙吾)와의 슬하에 한승인(韓承仁) 등 3남3녀를 두었다. [[분류:1914년 출생]][[분류:1994년 사망]][[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도쿄대학 출신]][[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