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의열단)] || 성명 ||한봉인(韓鳳仁) || || 생몰 ||[[1896년]] [[11월 21일]] ~ [[1968년]] [[1월 6일]] || ||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군]] 밀양면 가곡동 || || 사망지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군]]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한봉인은 1896년 11월 21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가곡동에서 아버지 한춘서(韓春瑞)와 어머니 김해출(金海出)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형인 [[한봉근]]과 함께 삼촌인 한춘옥의 미곡무역상 일을 하다 23세 때 숙부 한춘옥으로부터 100원을 지원받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1919년 봄 고산자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고향 친구인 [[김원봉]], 김상윤과 형 한봉근과 함께 재학해 교육을 마쳤고, 11월 10일 길림의 파호문밖 반씨 농가에서 의열단이 창단될 때 함께 했다. 이후 그는 무기를 국내로 반입시키는 데 가담했으며, 밀양에서 폭탄 의거를 벌이는 일에 관여했지만 실패했다. [[곽재기]], [[황상규]], [[윤세주]], 이낙준, 이성우, [[김기득]], [[서상락]] 등 인사들이 밀양 폭탄 의거가 계획 단계에서 발각된 뒤 대거 체포되었을 때, 상하이에 남아있던 그는 군자금 모집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내로 잠입하여 대구부 칠곡군 임천면 신동에 있는 이명근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하다가 거절을 당하기도 했지만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진행할 때 김원석과 함께 최수봉을 도왔다. 이후로도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모집에 열중하던 한봉인은 1925년 이종암・김재수・이병태・이병철・김병환・[[신철휴]]・이기양・이주현・배중세 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폭탄의거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일제에 탐지되어 여러 동지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를 모면한 그는 이종암, [[고인덕]] 등과 함께 대구로 내려가 1925년 11월 5일 달성군 달서면에 있는 배중세 집에서 이종암이 계획했던 의거를 실행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던 중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후 그는 공판에 넘겨졌고, 1926년 12월 18일 징역 8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형 한봉근과 함께 임시정부를 드나들며 [[김구]]를 도왔으며, 삼촌인 한춘옥에 영고탑 팔가둔에서 농장 일을 할 때 돕기도 했다. [[8.15 해방]] 후 밀양으로 돌아와서 초대 민선 밀양읍장 선거에서 당선되어 밀양읍장으로 봉직했고, 1968년 1월 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한봉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밀양시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6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의열단/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