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성우 겸 배우, rd1=한영숙)] [목차] == 개요 == 벽사(碧史) 한영숙(韓英淑, [[1920년]] [[2월 2일]]~[[1989년]] [[10월 7일]]) 한국의 전통무용가,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1995년]], '학연화대합설무'로 개칭)[* 일반적으로 '학춤'이라고 알려진 그것이다. 학무(鶴舞)는 [[1971년]] 처음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될 당시의 정식 지정명칭.]의 前 예능보유자. 할아버지 한성준(韓成俊, [[1874년]]~[[1941년]])[* 생몰년은 네이버에서 제공하고 있는 한겨레음악대사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함.][* 큰할아버지라는 말이 있고 할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우선 여기서는 지난 2017년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4&nNewsNumb=20170223384&nidx=23385|藝家를 찾아서-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 한성준의 후손들]]의 내용을 기준으로 하였다.]이 정립한 근대 한국 전통 무용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게 했던 20세기 한국 전통무용계의 거목(巨木). == 생애 == 1920년 충청남도 [[천안시|천안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 때부터 할아버지였던 한성준의 문하에서 춤을 배웠다. 한성준은 19세기 말~20세기 초반기에 활동했던 당대의 명고수로도 유명해 명인명창의 장단을 도맡아 쳤으며, 동시에 경기·충청도 지역에 전승되어왔던 재인 계통 춤을 집대성 해 근대적 무대 예술로 탈바꿈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이러한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춤이 태평무. 엇박이 많은 경기 지역 도당굿의 장단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춤은 장단을 모르면 출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장단 구조가 복잡하며, 이 복잡한 장단구조를 타고 빠른 발디딤으로 풀어낸다. 왕십리 일대의 당굿 장단을 대폭 수용해 이러한 복합성을 가장 극대화시키면서 보다 더 화려한 춤으로 발전시킨 것이 한영숙과 동문인 [[강선영(1925)|강선영]](姜善泳, 1925년~2016년 1월 21일)으로 강선영이 재구성한 태평무가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영숙은 한성준의 문하에서 살풀이춤, 승무, 태평무, 학춤, 검무, 선비춤, 바라춤 등을 배웠다. 18세가 되던 1937년[* 1935년 7월이나 10월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사전들도 있는데 1935년 12월에 준공된 극장에서 그해 7월, 10월에 공연한다는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아마 1937년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10월 서울 부민관(府民館)[* 지금의 중구 태평로 1가 60-1에 위치. 1935년 12월 10일 준공된 경성부 부립극장으로 1945년에 있었던 부민관투탄의거의 현장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이며 대강당 1,800석, 중강당 400석, 소강당 160석, 그 외에 특별실, 이발실, 식당 등 여러 부속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그 사용도가 여러번 바뀌기도 했는데, 대충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임시로 사용하다가 1949년 서울시 소유로 이관되었으며, 1950년 4월 국립극단의 창단과 함께 국립극장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6.25 전쟁]]으로 인해 [[국립극단]]이 대구로 이전한 뒤에는 비어있다가 수복 이후인 1954년 6월부터 3대 국회의 정식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가[* [[서울특별시의회]] 문서에는 1950년 이래로 표현되고 있으나 자세한 사실이 정보마다 다르다.]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이후에는 다시 시민회관으로 쓰였으며, 1976년 [[세종문화회관]]이 준공되면서 그 별관이 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11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있었던 한성준의 첫 무용발표회를 통해 처음 무대에 데뷔하였다. 이후 일본, 만주, 황해도, 평안도 등지로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김소희(판소리)|김소희]], 박귀희, 박초월 등이 돈암동에 개설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을 개설하고 무용교사로 일했고, 이후 1960년 이곳이 한국국악예술학교(現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개편된 뒤에도 계속 무용교사로 재직하였다. 이때 길러낸 제자들 가운데 사물놀이의 김덕수와 최종실이 있다.[* 단, 김덕수의 경우, 무용 전공은 아니었다. 김덕수는 당시 피리 전공에 판소리 부전공으로 들어갔다고 자신이 수 차례 증언하고 있다. 그보다 1년 후배인 최종실의 경우에는 당시 상세한 전공을 알 수 없다.] 그 외에 한영숙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서울예술대학, 세종대학교에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국립무용단, 서울시립무용단에서도 단원들을 대상으로 무용을 가르쳤다.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現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 [[1987년]] 이매방이 또 다른 예능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승무는 한성준-한영숙류와 이대조-이매방류의 2개 유파가 동시에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되었고, 이때 문하의 이애주([[1947년]]~[[2021년]] [[5월 10일]])와 정재만(1948년~2014년)을 각각 여자, 남자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두 사람은 한영숙 사후 한성준류 춤 전승의 중심 축이 되었으며 이애주는 [[1996년]]에 정재만은 [[2000년]]에 각각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정재만이 [[2014년]]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지정해제 된 이후, 지금까지는 이애주가 홀로 한성준-한영숙류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이애주가 2021년 5월에 사망한 이후, 현재는 2019년에 지정된 채상묵(이매방 계열)이 보유자로 남아있다. 다만, 그 과정이 시끄러운데, 자세한 건 [[https://www.yna.co.kr/view/AKR20191115164800005?input=1195m|관련 기사]] 참조.]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무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로서 활동하였다. 말년에는 15년 가까이 간경화증을 앓았으며, 또 만성[[심근경색]]으로 투병 생활을 길게 이어왔다. 그러한 와중이었던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무대[* 참고로 당시 올림픽에는 그 때까지 '무용가' 내지는 '안무가'라는 명함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총출동하다시피 하여 개막식, 폐막식 무대는 물론, 올림픽 전후에 있었던 거의 대부분 행사에서도 앞다투어 안무작을 발표하곤 했다.]에서 살풀이춤을 보여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89년 10월에 만성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 예술세계 == 한마디로 담백하고 깊이있는 춤 세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한영숙은 승무와 학무로 예능보유자가 되었지만, 그 외에도 살풀이춤, 태평무에도 능했다. 특히 경기, 충청 지역에서 전승되어 왔다는 재인계통 살풀이춤[* 한영숙의 제자인 정재만은 김덕원-김숙자 계열의 도살풀이춤을 경기 무속 계통의 살풀이춤으로, 이대조-이매방 계열의 살풀이춤을 호남 교방계통의 살풀이춤으로, 한성준-한영숙 계열의 살풀이춤을 경기 재인 계통의 살풀이춤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의 대가로 손꼽혔다. [[19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무대에서 선보였던 살풀이춤의 경우 당시 무용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호연으로 꼽혔으며, 사진기자 정범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그 무대를 사진에 담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면서 다른 공연장에서 한영숙에게 그 아쉬움을 토로하자 한영숙이 본래 태평무를 추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바꾸어 살풀이를 추어서 그것을 대신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이 때 찍은 사진으로 발간된 사진집이 1992년, 열화당에서 발간된 『한영숙 : 살풀이』라는 사진집이다.] 한영숙의 살풀이춤은 빠른 장단에서 나타나는 리드미컬한 빠른 발디딤과 화려하지는 않지만 선이 분명하면서도 단아한 팔사위가 특징이며 지은듯 만듯한 미소에 도도한 표정 연기를 통해 상대적으로 기품있어 보이는 춤태로 유명하다. 또 수건을 뿌릴 때에는 뿌리는 동작 이외의 인위적인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여 상대적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절제미가 돋보인다.[* 흔히 한영숙의 마지막 제자로 일컬어지는 한국 무용가 이은주는 '인위적인 움직임을 최소화 함으로써 춤을 추는 무용수마다 허공에 그려지는 수건의 선이 다른 맛이 있다.'고 자평하였다.] 한영숙의 승무는 이매방의 승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시선의 눈높이가 높으며, 북과장이 자진모리~당악 넘김채 정도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짧다. 대신 뒤이어 경기 대풍류의 당악 연주에 맞춘 춤이 다시 이어지는데, 이매방류 승무에 비해서 춤의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단, 근래에는 시간을 15분 내외로 대폭 줄이고, 이매방류와 마찬가지로 휘모리 북가락을 넣어서 다시 대풍류의 굿거리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또 비교적 차분했던 전반부의 호흡이 북과장-당악과장에서는 매우 활달하게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정재만은 이러한 높은 시선처리가 천신과의 교감을 의미하는 춤사위라고 한다.] == 여담 == * 무용가로서 후학 양성을 제법 많이하기도 했지만, 무용가가 아니면서도 그에게 춤을 배운 사람들이 몇 있다. 앞서 기술한 김덕수가 대표적이고, 또 한영숙과 절친했던 박초월의 수양아들인 조통달[* [[조관우]]의 아버지 그 조통달이 맞다.] 역시 국악예고 시절, 한영숙에게서 춤을 배웠는데, 한영숙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 일가가 모두 예술계에 관련을 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할아버지인 한성준은 물론 아버지 한희종 역시 피리, 해금 연주자로 활동했고,[* 정재만에 의하면 한영숙은 한희종의 서녀라고 한다.] 남편 황병렬은 아코디언 연주가로 활동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고 한다.] 사돈이 [[임방울]]이다.[* 임방울의 사위 중 한 사람이 한영숙의 친정 7촌 조카라 한다.] 또 가수 [[김완선]]이 5촌 조카가 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매니저이자 이모였던 한백희 역시 한영숙의 사촌 동생이 된다. [[분류:대한민국의 무용가]][[분류:1920년 출생]][[분류:1989년 사망]][[분류:천안시 출신 인물]][[분류:심근경색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