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한이윤}}}'''[br]'''韓伊尹'''}}}}}}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한이윤.jpg|width=100%]]}}} || ||<|2> '''출생''' ||[[1923년]] [[3월 7일]] || ||[[평안북도]] [[구성시|구성군]] 노동면 중방동 159번지[br](현 [[평안북도]] [[구성시]] 중방리) || ||<|2> '''사망''' ||[[1964년]] [[5월 1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366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행정공무원]]. [[한국광복군]]에 복무한 공적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923년 3월 7일 [[평안북도]] [[구성시|구성군]] 노동면 중방동 159번지(현 [[구성시]] 중방리)에서 태어났다. 신경법정대학(新京法政大學)[* [[만주국]] 멸망 후 1946년 10월 [[건국대학]]·신경의과대학(新京醫科大學)·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중앙사도학원(中央師道學院)·[[대동학원]]·신경여자사도대학(新京女子師道大學)·신경축산수의대학(新京畜山獸醫大學) 등 만주국 시기 창춘시내에 있던 14개의 [[단과대학]]이 합병되어 '창춘대학(長春大學)'이 설립되었다.] 재학 중이던 1944년 [[만주국]]을 탈출해 그해 9월 [[하북성]] [[베이징시|북평시]](北平市)에서 [[한국광복군]]에 입대했고, 광복군 제3지대가 주둔하던 [[안휘성]] [[푸양시(안후이성)|부양현]](阜陽縣)으로 이동했다. 그 뒤 [[김영일(1925)|김영일]], [[박재곤]], [[박상기(독립운동가)|박상기]] 등과 제3지대 기관지 '빛'을 발간해 광복군 자체의 교육자료로 이용케 하고 선전용으로 각 지역에 배포했다. 기관지 '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의 투쟁사와 일본군의 죄상을 밝혀 한국의 독립이 머지 않았다는 신념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해 국민 총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한이윤은 창간호에 '행위의 이념'이라는 제목으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일부를 인용해 독립운동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담은 글을 발표하였다. 1945년 2월 중국 화중지구 지하공작대원에 선임되어 활약했고, 그해 5월 안휘성 입황현(立煌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류안시(六安市) 진자이현(金寨縣).]에서 김영일, [[김용관(1926)|김용관]], [[이창도]] 등과 [[OSS]] 훈련 무전반에 편입되어 훈련을 수료했다. 1945년 8월에는 국내정진공작대에 무전반원에 선발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위해 평안북도 [[선천군]] [[신미도]] 부근에 상륙하기로 계획하고 작전 명령을 기다리던 중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독립운동사 제6권에 따르면 제2지대와 제3지대 별도로 국내진공작전 명단이 다르다. 제2지대와 제3지대가 별도로 훈련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휘하에서 [[김우전]], [[박승헌]], [[전이호]], [[옥인찬]] 등과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에 근무하다가 옥인찬 휘하의 상해 지구 특파단에 파견되어 교포들의 치안 및 귀국 주선에 힘썼다. 귀국 후에는 행정공무원에 임용되어 [[보건사회부]]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1960년 12월 3일 국립공주병원으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0120400329103019&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0-12-04&officeId=00032&pageNo=3&printNo=4548&publishType=00010|전보되었다]]. 그 뒤 1963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3081400209206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08-14&officeId=00020&pageNo=6&printNo=12860&publishType=00020|수여받았고]], 1963년 12월 16일 보건사회부 산하 부녀국이 부녀아동국으로 [[http://www.genderarchive.or.kr/items/show/10973|개편되자]] 부녀아동국장 직무대리에 임명되었다. 1964년 1월 [[대한적십자사]] 청소년부장 [[서영훈]]과 어린이 보건 정책에 대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401190023910600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4-01-19&officeId=00023&pageNo=6&printNo=13144&publishType=00010|대담]]을 나눈 것이 기사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4년 5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갑작스럽게 별세했으며, 사후 같은 달 22일에 행정[[부이사관]]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4052200209202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5-22&officeId=00020&pageNo=2&printNo=13099&publishType=00020|추서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5년 5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 참고자료 ==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Merit&mngNo=8670|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 제6권 [[https://m.blog.naver.com/jsy1851/221004111395|#]]광복군 [[김문택]] 수기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광복군/군인]][[분류:실향민]][[분류:구성시 출신 인물]][[분류:1923년 출생]][[분류:196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