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한철수}}}'''[br]'''韓哲洙'''}}}}}}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한철수(송화 독립운동가).jpg|width=100%]]}}} || || '''초명''' ||한경우(韓敬愚) || || '''호''' ||야당(冶堂) || || '''본관''' ||[[청주 한씨]][* 참판공파 30세 우(愚) 항렬.] || ||<|2> '''출생''' ||[[1900년]] [[11월 29일]] || ||[[황해도]] [[송화군]] 중장양면 연산동[*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br](現 [[황해남도]] [[삼천군]] 괴정리) || ||<|2> '''사망''' ||[[1988년]] [[10월 16일]] (향년 87세) || ||[[경기도]] [[파주군]] (現 [[파주시]])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475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900년]] [[11월 29일]] [[황해도]] [[송화군]] 중장양면 연산동(現 [[황해남도]] [[삼천군]] 괴정리)에서 아버지 청송(靑松) 한여동(韓璵東, 1881. 7. 1 ~ 1945. 1. 12)[* 자는 흥옥(興玉).]과 어머니 [[진주 류씨]] 류군심(柳君心, 1882. 5. 12 ~ 1950. 9. 26)[* 류현수(柳賢秀)의 딸이다.] 사이에서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고향 송화군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現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970|대한독립단]] 본부에서 특별 파견된 강옥진(姜玉珍)과 함께 송화군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5206|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서 파견된 유건혁(柳健赫)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의 별동대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에서 제2영 제1대대장 부관 및 대장(隊長)으로 활약했다. 1921년 2월에는 광복군사령부 참모장(參謀將)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930|이탁]](李鐸)의 지시로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1243|김창곤]](金昌坤)·[[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514|신계관]](申啓寬)·[[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2658|정치민]](鄭致敏) 등과 함께 국내 특파원에 임명돼, 국내 진입 후 독립단(獨立團)·숭의단(崇義團)·청년단(靑年團)·한족회(韓族會)를 비롯한 여러 항일 비밀결사와 연락을 유지하며 여러 청년들을 포섭한 뒤 광복군사령부 본영에 수급하는 한편,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임무를 마치고 본부로 귀환하던 중 2월 28일 [[평안북도]] [[의주군]] 교외에서 일본군 헌병과 맞닥뜨려 교전을 벌인 끝에 [[http://db.history.go.kr/id/hdsr_013_0590|2명을]]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1_02_99_1070|사살했다]]. 결국 같은 해 6월 27일 만주에서 중국 관헌에 김창곤 등과 함께 [[http://db.history.go.kr/id/haf_043_0660|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24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사형을 [[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7_08_0130|선고받았다]]. 이에 불복, 공소하여 1922년 4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으로 감형된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http://db.history.go.kr/id/su_006_1922_04_05_0390|#]] 1925년 출옥 후 오병섭(吳秉燮)과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다 체포되었으며, 그 후 [[일본]] [[교토시]]로 건너가 [[리츠메이칸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신간회]] 교토지부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으며, 비밀결사 철성단(鐵聲團)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대학교 졸업 후 1929년 귀국했다. 1932년에는 [[만주국]] [[길림성]] [[길림시]]로 건너가 기독교 장로로 목회 활동을 했다. 1937년 9월 1일에는 [[동아일보]] 길림지국장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7_10_25_x0004_0490|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15일 사직하였고, 같은 날 [[겸이포]]지국 고문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37_12_19_w0008_1290|임명되었다]]. 이후 중국으로 다시 건너갔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6년 12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월남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에 살다가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88년 10월 16일 [[경기도]] [[파주군]](現 [[파주시]])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1995년 10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송화군 출신 인물]][[분류:실향민]][[분류:청주 한씨 참판공파]][[분류:1900년 출생]][[분류:1988년 사망]][[분류:리츠메이칸대학 출신]][[분류:동아일보 관련 인물]][[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건국훈장 애국장]]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한철수, version=5)]